63누가복음 20:27-47 부활에 관한 논쟁
63강 /
누가복음 20:27-47
부활에 관한 논쟁
세금에 관한 질문을 하였던 자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는 예수님의 답변에 대하여 한 마디도 더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아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에 논쟁을 더 이상 진전을 시킬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다.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27절)라고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귀족 그룹으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가문이나 그들의 친인척들로 구성된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구전 전승을 거부했는데 그것에는 부활 신앙에 대한 거부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 누가의 기록에서 사두개인들의 등장은 여기서 처음이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에 대한 기록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왜나하면 그들과 관련된 성전 지도자들 그룹을 이미 앞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눅 19:47, 20:1,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굳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무리들을 사두개인들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교리적 주장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을 하였다는 것에서 사두개인들의 등장을 의미 있게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인간들은 모든 것을 다 총동원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 죽이려고 한다는 강조이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성전의 지도자들까지, 심지어 정치적인 것까지라도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 등 이념과 사상과 교리가 서로 달라도 서로 손잡고 힘을 합하게 되는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예수님을 처단하자는 것이다. 이만큼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원수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조직을 총동원하고 모든 사상과 교리, 모든 세력을 다 동원하여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고 죽이려고 하는 존재가 바로 죄인들이라는 것을 누가는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이다. 단순히 하나님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죄인들의 심성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마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이런 점에서 죄인이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사후 부활에 대한 것으로 그들 자신은 정작 받아들이지 않는 주제였다. 즉,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부끄럽게 만들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의 의도에 불과한 것이지 오히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 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시대의 변천이나 사회의 추이에 따라 율법을 해석하고 그 해석들로 이루어지는 전통을 존중하는 자들이라면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의 문자를 그대로 고집하는 자들이었다. 본문은 신명기 25:5-10에 규정되어 있는 형제에 대한 혼인 규례에 따라 한 여자가 차례로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을 경우에, 만일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먼저 율법의 원칙을 진술하고 나서 부활 때에 야기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일곱 형제들이 번갈아 가며 한 여인과 결혼했고 자식이 없이 죽었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즉, 아무도 상속자를 낳게 해주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진짜 남편임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34-38절).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정말로 장가 시집가는 일이 없는가? 우리는 이런 말씀을 가지고 천국에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천국에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천국에 결혼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것이 있든 없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에 의해 부활함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출애굽 하는 일에 부름 받는 장면을 언급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출 3:15).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당시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은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이삭에게 하신 약속,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동일한데 그 약속들을 지금 모세를 통해 지키신다는 것이다. 단순히 과거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들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이다. 약속을 이루신다는 점에서 하나님 편에서 누구나 약속 안에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하신 약속들을 하나님께서 지금 지키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거의 사람들을 지금 현재 이 자리에 불러놓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주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와 상대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산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생명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죽어 있다면 죽어 있는 자를 하나님은 살려서라도 그와 상대하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맺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지는 나라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장가, 시집가는 이 땅의 일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을 두고 말한다. 생명 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관계는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이제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시게 된다. 예수님은 질문을 당하는 자에서 질문을 하는 자로 바뀌어 있다. 대적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41절). 사람들은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으로 기대했다(삼하 7:12-16, 시 89:19-29).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백성들의 기대를 반영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에서 다윗이 메시야를 주라고 불렀던 것을 인용하신다(42-43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시 110:1). 그리고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신다.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44절).
예수님은 누가복음 1장의 족보에서도 본 바와 같이 다윗 가문의 출신이다(눅 1:32-33). 예수님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의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단순히 다윗이 다스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가 상징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통치자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말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분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다윗이 말하는 주로서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실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이다. 사람들의 반대와 모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자가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다. 모든 사건, 모든 질문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을 모함하여 곤경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는 죄인들의 도전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신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죄인들은 예수님은 죽이려고 하나 하나님은 이미 예수님을 다시 살리실 것을 계획하고 계셨다. 사람들의 예수님을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자기 백성들을 예수님과 같이 다시 살리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8절)는 말씀의 의미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죽은 자가 되었다.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목숨이 끊어진다는 것은 이러한 죽음의 결과일 뿐이다. 생명되신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살아 있다고 해서 산 자가 아니다. 우리는 살았다고 보나 하나님은 이미 죄 가운데서 죽은 자로 보신다. 우리의 기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았다고 우길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죽었던 자임을 인정하는 자이다. 죽었던 존재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산 자로 만드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는 더 이상 세상의 혈육 관계로 인하여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말씀 안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