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58.누가복음 19:1-10 세리장 삭개오

불편한 진리 2014. 12. 3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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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세리장 삭개오

 

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18:31에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시다. 즉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시는 노정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 여리고를 통해서 가는 길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은 강도가 자주 나타나는 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여리고에 가까이 가실 때에 한 소경을 만나 그를 고쳐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시는 것이다.

 

2절에 보면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여리고에 삭개오를 만나러 가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5절에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하여야 하겠다라는 표현은 당위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여리고를 경유하신 목적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신 것은 단순히 길을 가다가 나무에 오른 삭개오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삭개오를 찾아가셨고 그에 대한 사건을 누가는 기록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신 것은 우연히 있었던 일이 아니었기에 누가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앞의 메시지와 문맥상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부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것과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것이 소경을 고치신 사건과 삭개오를 만나신 사건과 연결된 문맥으로 이해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 관원과의 대화에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8:24-25)고 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라고 하였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 마디로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18:27)고 답변하셨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들을 실제적인 예를 소경을 고치신 사건과 삭개오를 만나신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라고 하였다. 당시의 세리란 죄인의 대표상으로 취급되었다. 더구나 삭개오가 세리장이었다면 그에 대한 명성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자신의 직위 때문에 그러하였는지 부자였던 것이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삭개오는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삭개오가 어떤 이유로 인해서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한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3-4).

흔히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도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간절히 찾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 삭개오의 노력과 공로를 칭찬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삭개오의 노력과 공로를 말하기보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오셨다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것은 단지 그의 신체적인 결점 때문이지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못된다. 오히려 나무 위로 오른 삭개오를 예수님이 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신다. 삭개오에게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하신 것은 삭개오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시는 차원이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노력을 인정하여 나무 위에서 만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5).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가서 그의 집에 유숙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의 반응은 즐거움과 만족 그 자체였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 예수님의 부르심에 죄인은 거절할 수 없으며 또한 즉각적인 순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모시고 이렇게 말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8).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부당하게 남의 것을 빼앗았을 경우에는 본물에 1/5을 더해서 돌려보내야 하며(6:1-5, 5:7),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경우에는 다섯 배 또는 네 배로 변상해야 되었다(22:1, 삼하 12:6).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시인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행하겠다고 한 것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삭개오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모든 물질을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회개란 우리가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었을 때 나오는 것이다. 신앙은 뜬구름 잡는 식의 공허한 허상이 아니다. 신앙이란 현실이다. 신앙이 현실이라고 하였을 때 그 의미는 눈에 보이는 삶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식의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사는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그분의 삶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라 주님의 삶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꼭 무엇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이 삶의 전부요 하늘의 것이 더욱 소중한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이 땅의 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러한 삶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9).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구원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삭개오에게 이런 회개의 열매가 맺히게 된 것은 예수님이 그를 만나신 결과이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아오신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삭개오의 회개를 통해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확증하여 주신 것이었다.

 

본문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을 쉬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구원이 찾아왔다고 하였다. 즉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을 빗대어 표현된 말이다. 예수님이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10절에서 이렇게 선언함으로 삭개오 사건을 마무리짓고 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9절 말씀과 연관하여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또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기 위함이었다.

 

본문에서 삭개오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의 상징적 인물로 등장된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서 비록 죄인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다. 그 믿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결과로 말미암아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라는 물음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신 것을 통해 구체적인 답변을 주고 계신 것이다. 거지 소경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진짜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부자가 아니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죄인의 대표상으로 취급되는 부자 삭개오를 등장시켜 그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율법에 의한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찾아오심이라는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요 하나님 나라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여기서도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을 때의 부자란 무조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천국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부자임을 명확히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자는 자신의 가진 물질 때문에 그것을 힘으로 삼아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반면,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결코 의롭지 않다는 것을 아는 자는 물질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힘으로 여기고 힘으로 삼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흩어버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분명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난 것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가셨을 때에 삭개오에게서는 회개의 열매들이 맺히는 반면 무리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7). 결국 구원이란 우리의 힘과 노력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이다.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생명이신 예수님을 끝없이 비난하는 존재에 불과하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