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누가복음 18:31-43 소경을 고치심
57강 /
누가복음 18:31-43
소경을 고치심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선한 선생이라고 부르면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단순히 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부자 관원에게 몇 가지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오히려 그의 죄악된 심성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계명을 말씀하면서 이것을 지키라고 하시니 부자 관원은 그 모든 것을 어릴 때부터 이미 지켜왔다고 대답하였다. 부자 관원은 계명은 잘 지켰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에 빠져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계명을 지켜서 영생을 취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부자의 이런 마음을 간파하신 주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5)고 하셨다. 결국 부자란 재물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모든 인간은 부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자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의로운 자기 행위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며 영생을 쟁취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6)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오늘 본문이다.
예수님은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자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31-33절).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자신의 십자가가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전제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신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사람이 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차원이 아니다. 말씀 성취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마가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워져서 결정적으로 이방인들에게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즉 이방인들에게 넘기워질 것을 바로 언급함으로 누가 자신이 이방인이고 또한 이방인에게 일차적으로 이 서신이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죽인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의 이러한 언급은 단순히 예수님을 죽인 죄가 유대인들만의 죄가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죄도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예언을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언급하셨지만 제자들은 이를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34절). 아직 제자들에게 이 사실은 감추어진 비밀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사실을 나타내신 자가 있었으니 그가 곧 소경이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무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경에게 해준 답변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이었다(37절).
그러나 소경은 외쳐 부르기를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8-39절).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이라는 한 시골 출신의 선생정도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소경은 이해는 달랐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라면 예수님이 곧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의미이다. 다윗 왕의 후손이라면 예수님이 곧 왕이라고 고백한 것이었다. 1장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렇게 알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소경이 고백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후손, 즉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면 그 나라를 보기 소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예수님은 소경을 데리고 오라고 하시면서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소경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41절).
소경의 간절한 기대는 보는 것이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결코 눈을 떠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그 이상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언급하실 때에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했다. 제자들에게도 감추어진 비밀이 소경에게는 밝히 드러나 있다는 측면에서 소경은 소경이 아니라 이미 보는 자였다.
예수님은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2절)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소경이 믿음이 좋으니 그 믿음대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소경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다. “네 믿음”이란 ‘네게 주어진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네게 주어진 믿음이란 제자들에게도 감추어진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이 소경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서 믿음의 주체로 소경을 찾아오신 것이었다. 즉 예수님께서 소경을 찾아오셨다는 점에서 믿음이신 예수님 자신이 소경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소경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을 찾아오심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찾아오심의 결과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한 마디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고백으로 나오게 된다. 이는 소경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소경의 고백은 앞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 언급되는 세리의 고백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지만 세리는 자기는 낮추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야 된다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경의 마음은 바로 세리와 같은 마음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마음에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조건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주어질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자기를 내세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감히 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한 존재가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 결과이다. 결국 자기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누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죄를 유대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결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지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행위로 영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행위로 영생을 취하려고 이런 자들이 바로 부자이다. 부자는 예수님께 나아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다. 구원 얻을 수 있는 자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누가는 부자와 소경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 특히 소경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다가”(35절)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거지라는 의미이다. 부자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켜왔고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였기에 계속 자신이 의롭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하나님 나라에 자기 행위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반면 소경은 자신이 거지였고 길가에서 비록 구걸하는 자였기에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엄두초차도 내지 못하고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면서 그 나라를 보기 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부자 관원을 자기 의로움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지만 거지 소경은 찾아 갈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찾아가서 자기 의로움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찾아오심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언급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자들이기에 주님께서 하나님의 의로 찾아오시지 않는다면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일 때마다 말씀을 볼 때마다 세리와 같은 마음으로, 소경과 같은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자는 바로 이러한 자들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3.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