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40.누가복음 12:13-34 어리석은 부자

불편한 진리 2014. 12. 2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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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3-34 

어리석은 부자

 

인간이 의를 이루는 것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12)고 선언하셨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잘 설명하게 되는 언변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핍박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율법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가 예수님께 와서 형을 타일러서 유산을 잘 나누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민수기 27:1-11과 신명기 21:15-17에 상속에 관한 규례가 명시되어 있지만 예수님께 나온 자는 율법의 규례에 따라 재산 분배를 받지 못한 것 같다. 당시의 율법사들은 백성들의 여러 가지 율법에 관한 문제를 상담해 주었기에 재산에 대한 고민을 안고 나온 자는 예수님을 율법사로 오해하였던 것 같다. 예수님은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14-15)라고 말씀하셨다.

 

형과의 재산 분배가 제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은 탐심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지적하신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다. 비유의 내용인즉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많아지자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두고 편안하게 먹고 쉬며 즐기자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0).

여기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인간의 탐심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로 인하여 어떤 교훈을 주시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에 대한 결론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1).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결국을 주장하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11장에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폭로하셨다. 율법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서 율법에 의한 외식, 위선들을 철저히 벗겨서 인간의 실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신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는 율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인된 실체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재물이라는 것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으로 자신을 가리며 살고 있었는데 재물이 주어지니 인간의 탐심이 다 드러나게 된다.

이 탐심이 곧 우상 숭배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3: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5:5).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탐욕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혹은 내가라는 말이 6번이나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 부자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자기 의로 삼고 철저히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폭로하심으로 그것으로 하늘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에 생명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소유, 물질에 생명이 있는가? 물질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탐심, 즉 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더해진 외부적인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 것인가 혹은 자기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 것인가를 항상 염려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러기 때문에 염려하며 살지 말라는 말씀인가?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도무지 살 수가 없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어떻게? 그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까마귀는 심는 것도 거두는 것도 없고 창고나 골방도 없지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기르시기 때문이다. 백합화 역시 옷을 만들어 입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입하시기 때문이다. 새나 백합화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 새는 새 나름대로 열심히 먹이를 구하러 다니며 백합화 역시 나름대로 열심히 양분을 흡수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29-31). 까마귀, 백합화 같은 것들에게는 그것들을 기르시는 하나님이지만 성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신다. 이 관계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매우 중요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에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고 자기 백성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주기 원하신다면 성도는 마땅히 그의 나라를 구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되어 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 그분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다. 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 이런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로 산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필요한 만큼 더하신다. 물론 주시지 않을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든 주시지 않든 세상의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나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관심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소유란 탐심과 반드시 연관되어 있다. 탐심을 초월한 존재가 이 땅에 있는가? 이 땅에 어느 누구도 탐심에서 자유로운 자가 있을 수 없다. 율법으로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세상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필요한 것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구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의 나라를 구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만드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이런 존재로 만드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령어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런 모습으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이다.

 

결국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는 것은 율법을 가지고 스스로를 치장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드러내신 것은 십자가로 인간의 죄를 온전히 드러내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33-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제를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또한 이 말씀은 적금하듯이 헌금을 해서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도 아니다. 소유를 내게서 버리는 것을 통해 내 속에 탐심이 어떻게 요동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결국 우리에게 무엇이 보물인가? 우리가 세상 물질에 마음이 빼앗겨서 살아간다면 세상의 소유가 우리의 보물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보물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보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있고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수시로 폭로하고자 하신다. 그래서 물질을 통해 우리의 탐욕을 보여주시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을 오직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가 성도이다. 성령 그분이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것을 날마다 말씀으로 확인하고 있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