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누가복음

39.누가복음 12:1-12 바리새인의 누룩

불편한 진리 2014. 12. 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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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12 

바리새인의 누룩

 

마태복음 5: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율법사를 예수님이 책망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나쁘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성토하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그들만큼 율법적으로 완벽하게 살았던 자도 없었다.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썼던 자들이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바리새인보다 강한 자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선언을 한 번 생각해 보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떻게 더욱 완벽하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 그들보다 더 나은 의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행위만 율법의 제재를 받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로만 완벽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셨다. 이는 그들만 특별히 잘못되었기 때문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들의 죄악을 대표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율법이 있든 없든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행동에 흠 잡힐 데가 없으면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외적인 행동으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까지 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죄악의 지적과 화를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향한 것만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 다음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만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제자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이다. 1절에 보면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예수님이 주의를 주는 그런 말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주의하라고 한다고 해서 인간이 주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곧 외식을 말한다. 바리새인의 외식이란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말씀하신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즉 겉으로 율법이 지켜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외식이다. 밖으로 율법의 행위가 완벽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이고 외식이었다.

이어서 예수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2-3)고 말씀하셨다. 내면적인 것이 밖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온전히 드러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것을 드러내고 밝히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4:12-13).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율법이 인간의 내면적인 것까지 드러내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철저히 드러내시기 때문에 숨길 수 없고 감출 수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드러내신 것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를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폭로하신다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바리새인보다 어떻게 더 나은 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에게서는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분이 십자가를 지실 것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싫어하여 하나님을 죽인 인간의 모든 죄가 다 폭로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것만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보다 더 나은 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를 덧입는 것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선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2:8-9).

 

따라서 제자들은 더 이상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4-5).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생명을 주장하시고 심판의 주가 되신다.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은 세세한 것까지 철저히 꾀뚫어 보는 분이시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6-7). 우리가 사소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는 모르고 넘어가는 것이 없고 동시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심판주라는 것을 알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영생이다. 하늘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8-9). 막연하게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고 율법의 말씀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런 발언이 충격이었을 것이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자라는 말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사용하였던 용어이다. 에스겔이나 다니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고난 중에서 인자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는 메시야로 오셨다는 것을 인자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심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고백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백하고 시인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0절에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소위 말하는 성령 모독죄 또는 성령 훼방죄라고 하는 말씀이다. 무엇이 성령 모독죄인가?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의 말씀들을 거부하는 것은 용서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때에 성령님의 사역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역이 다 드러난 상태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곧 십자가를 보여주고 증거하시는 일이다(16:13-14).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증거하시는 일에 동참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죄사함 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식적으로 알고 고백하는 것은 세상의 권세나 힘에 의해 무참히 굴복 당하고 말 것이다. 성령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이다. 따라서 세상의 아무리 권세 있는 자 앞에 끌려간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1-12).

여기서 성령께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우리가 말이 어눌하거나 또는 복음을 유창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에 성령께서 복음을 잘 설명하고 전도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도 결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게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어떤 방해나 힘으로 위협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일은 성령님의 몫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인이 생명을 누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안되고 성령께서 고백하고 시인하게 하시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의 어떤 핍박이나 힘의 위협 앞에서도 십자가를 따르도록 마땅히 할 말,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말을 주시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