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누가복음 11:37-54 여섯 가지 화
38강 /
누가복음 11:37-54
여섯 가지 화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지음 받은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지난주 중에 케이블TV의 기독교방송에서 모 목사가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하면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인간은 외모를 보기 때문에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면 외모를 보고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들의 그 모습이 바로 죄악된 것임을 알아야 할진대 교회가 우리의 죄악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바로 이러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서 적나라하게 폭로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7-38절).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하였다. 왜 초청하였을까? 그가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예수님을 존경해서라거나 혹은 메시야로 인정하였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을 초청하여 그에게 율법의 말씀을 더 배우고자 하는 그런 의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을 초청하여 어떤 꼬투리를 잡아보고자 했던 마음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함을 인하여 유심히 마음에 두었다. 마가복음 7:1-4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율법이 아닌 장로들의 유전에 근거한 정결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의 생각을 아셨다. 아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죄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한 바리새인이 식사에 초청하도록 꾸미신 것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정결 예식을 무시함으로 그들의 생각을 끄집어내어 인간의 죄악을 드러내고 지적하고자 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의도대로 모든 상황이 설정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39-4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단순히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행함을 촉구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27-36절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셨다. 계시가 주어지기 전의 인간의 상태는 어두움이라고 말씀하셨다. 눈이 어둡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하셨다(34절). 예수님은 인간에게 희망을 걸고 의의 삶을 살아가기를 요구하신 적이 없다. 누구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은 결코 스스로 깨끗하게 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이다. 정결례를 통해 겉을 깨끗하게 닦고 씻지만 인간은 속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결 의식을 예수님 무시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정결례를 행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스스로 홀로 깨끗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화’(禍)를 선언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42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십일조를 지지하셨고 또한 행하고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아예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정당성의 신약적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고 지적하신 것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사소한 정결 예식에 매여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죄요 또한 인간의 죄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의식을 잘 행하고 정결 예식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율법 자체에 매여 있었기에 위선과 탐욕만 그 속에 가득 담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스스로 높아진 것에 만족하며(43절), 구별된 삶이 없었던 것이다. 외적으로는 의로운 척 하지만 그 속은 무덤과 같이 더러움과 부정하게 만드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들이다(44절).
45절에 보면 율법사가 예수님께 의의를 제기한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바리새인과 율법사가 결탁되어 있고 한 통속임이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의로운 체 하는 율법사까지 한 통속으로 몰아넣으셨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 대한 화를 말씀하신 것과 연관하여 율법사를 향한 ‘화’를 선포하신다.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
율법사들은 율법을 연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세세한 규정에 매이도록 하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은 조금도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욱 확대하여 율법사들의 죄를 지적하고 폭로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47-48절). 율법사들의 조상,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뜻과 공의와 인애를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죽이고도 오히려 무덤을 쌓아놓고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꾸미면서 조상들의 죄악을 합법화하고 자신들의 교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49-51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에 충실하셨기에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부지런히 이스라엘에 보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죽였기에 죄에 대한 응당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라는 말씀은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아벨의 사건에서부터 유대인들이 가진 히브리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 24:17-22에 기록된 마지막 피의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의를 무시한 역사요 지금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를 통해 드러난 죄를 볼 때에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루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여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철저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가지 화를 더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52절).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을 받아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속에는 율법의 본질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없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형식만 난무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53-54절). 죄인은 항상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도 바로 이러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향해 화를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수님 만으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