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누가복음 10:1-16 칠십 인을 세우심
32강 /
누가복음 10:1-16
칠십 인을 세우심
1절에 보면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보면 모범적으로 취하기 바쁘다. 대충 이런 식이다. ‘예수님이 70인을 파송하셨다. 그리고 70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는 만족할 만큼 좋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방법대로 해야 전도의 결과가 좋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전도하셨는가? 70인을 세우시되 예수님께서 하신 전도 방법은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반드시 전도는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전도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은 이런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이렇게 전도하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라면 이 말씀 자체가 생명의 말씀이 되겠는가? 우리는 전도를 생각하면 무조건 우리의 사명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도는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전도는 주님의 일이다. 고린도전서 1:21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죄인들이 자기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전도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을 설득하고 굴복시켜서 복음을 믿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통해 복음을 드러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칠십 인을 세우신 것은 우리에게 전도하는 방법을 찾고 그에 따라 전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을 세상 속에 집어넣었을 때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보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 자신이 하나님 나라로 이 세상에 나타내셨을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와 아닌 자가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작업이 바로 칠십 인을 세우신 일이다.
제자들은 복음을 오해하였다. 어떻게 오해하였는가? 9:46이하의 말씀에서 본 대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다툼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것을 금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에 유숙하고자 할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심판하시기를 구하였던 제자들이었다.
제자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에서 어떤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이해하고 예수님을 통해 높은 자리에 관심을 가진 그들이었다.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기에 그들로 말미암아 복음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가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복음이 세상에서 어떤 현상을 유발하게 되는지를 70인을 세우셔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 24:1이나 민수기 11:16에 보면 이스라엘의 대표로 70인의 장로가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0인이란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칠십 인을 세우셨다는 것은 그들을 상징적인 이스라엘로 세우셔서 유대의 각동 각처로 보내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가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예수님만이 참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증거하고 드러냄으로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라는 것이다. 복음이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다.
2절에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없다는 것이다. 추수란 이제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수할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다.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것은 지금 제자들의 상황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복음을 증거할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 고로 이 말씀은 추수할 일꾼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청하여야 한다. 추수는 누가 하는가? 주인이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당연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은 일꾼을 당당하게 요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의 추수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추수의 주인이 따로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일꾼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임의대로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좇아 추수해야 한다.
그렇다면 추수하는 일꾼의 입장에서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4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 살 길을 염려해서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을 갖춘다는 것은 주인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징 않는 자기 중심의 삶이다. 추수하는 일꾼은 오직 주인의 추수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이 복음에만 관심 가지도록 가만히 두지 않는 죄악된 상태이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절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평안을 선포하라는 뜻이다. 진정한 평안이란 복음이 아니고는 세상에 주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6절). 이 말씀은 흔히 말하듯이 심방할 때에 목사가 그 가정에 평안을 빌었는데 제대로 받아들일 상태가 아니라면 목사에게 다시 되돌아온다는 말이 아니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평안이란 어디든지 임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왜 그런가? 사람이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는 분이 따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도래하였기에 평안이 주어지는 기준은 오직 예수님이다. 따라서 율법이라는 옛 틀 안에 평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병자를 고치면서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해야 하고(9절), 또한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10절). 이것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이 확인을 위해 예수님은 70인을 세우셔서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오직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구원과 심판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복음이 세상에 주어짐으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구분하고 구원과 심판으로 갈라내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는 일은 없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구원의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늘 확인하게 된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과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7절에 보면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흔히 이 말씀을 곡해하여 목회자가 교회로부터 봉급을 받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또 전도하는 사람은 교회나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풍성한 대접을 받는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살려주시는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주인의 밭에 추수하는 일꾼은 주인이 먹여 살려주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복음만 드러내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은혜로 사는 것이지 자기 노력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만을 위해서 산다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알아서 책임지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라면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이다. 하늘에 주인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13-15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 지방을 떠나 유대로 가시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까지 갈릴리에 집중적으로 복음을 드러내셨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도시들을 언급하여 인간들이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16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역시 전도자의 특권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누가 기준인가를 알라는 말씀이다. 나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드러낼 때에 그것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나를 싫어하고 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미워하고 십자가를 부인하는 행위라는 말씀이다.
결국 본문이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전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고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그들을 세상에 던져놓으심으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도록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는 주인이 하늘에 따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그분의 뜻을 따라 추수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