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누가복음 5:17-26 죄 사함의 권세
15강 /
누가복음 5:17-26
죄 사함의 권세
성경을 해석할 때에 우리가 잘 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성경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낱말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겨를 없이 은혜롭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믿음, 사랑, 소망, 선(善) 이런 용어들이 나오면 그저 좋은 게 좋다고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과 연관된 낱말로 생각하고 이해하게 된다. 무조건 그렇게만 본다면 실제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고 나중에는 이상한 해석이 되고 만다.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으레 주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즉 중풍병자를 비롯하여 네 사람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고 쉽게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저희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누구의 믿음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중풍병자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중풍병자의 믿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풍병자에게서 어떤 믿음의 일면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중풍병자가 믿음이 있었다는 의미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면 과연 누구의 믿음인가? 그 다음 관심을 우리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에게로 돌릴 수 있다. 중풍병자를 살리려고 메고 왔으며 또 남의 지붕을 뜯어 달아 내려서라도 중풍병자를 살리고자 하는 네 사람의 믿음? 언뜻 생각하면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네 사람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성경 어디에도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누군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즉 성경 전체의 말씀과도 어긋나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누구’의 믿음인가?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믿음이라기보다 ‘어떤’ 믿음인가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예수님 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드러내시는 차원이었다고 할지라도 무지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몰려들어 말씀도 들었지만 정작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들의 병을 고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갈릴리 각 지역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까지 예수님 앞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들이 예수님 앞에 자리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의 관심을 끌게 되니까 율법적으로 바른 교훈인지 아닌지 판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참석한 의도는 21절에서 다 드러나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참람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말이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혹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가 교리적으로 타당한 가르침을 하는가 민중들을 선동하는 이단은 아닌가를 조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들의 마음 상태를 아셨다.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고 또한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들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잘 고치니 자신들의 병도 잘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저희 믿음’이란 이러한 인간들의 잘못된 믿음을 주님께서 보셨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주신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용한 의사정도로 이해하고 신뢰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고 또한 그 마음 상태를 아셨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하여 유대와 예루살렘에서부터 파견 나와 있는 그러한 상태였기에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는 중에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고 왔기에 우연히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오도록 조치를 취하셨고 그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메시야 됨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사람들의 믿음은 자신들의 질병을 고치는 차원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이 질병을 고치는 자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그냥 고쳐주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라고 물으셨다(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마음에 의논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음에 의논하였다는 것은 누군가 굳이 밖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아니면 죄를 사하실 수 없다는 의문을 서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전제를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절)라고 다시 물으신다. 어느 것이 쉬운가? 이 둘 중에 쉬운 것은 없다. 달을 따는 것이 쉬운가 별을 따는 것이 쉬운가 라고 묻는 것과 동일한 차원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은 묻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 두 가지 현상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줄로 알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먼저 선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는가? 중풍병자의 질병을 고쳐주실 필요 없이 죄를 사하셨으면 되는데 굳이 그의 병을 고쳐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죄 사함이란 얼마든지 사람 눈을 속일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죄 사함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그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중풍병에서 나아서 걸어다닐 수 있는 가시적 현상으로 나타내 주신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모든 질병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온다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예수님이 지금 드러내신 것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드러내실 때에 누가는 예수님을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성취하신 분으로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은 언약의 성취자로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눈먼 자를 보게 하시며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중풍병을 비롯한 모든 질병들은 죄가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 질병, 고통, 이런 것들은 이 땅에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생기게 된 죄의 증상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서 죄의 증상들을 제거하심으로 죄 사함의 의미가 죄에서 놓임 받고 해방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앞의 본문에서 문둥병 들린 사람이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였는데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누가는 그러한 의미를 이 본문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문둥병 자체에서 고침을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에 명한 대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메시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것이 곧 깨끗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 자신이 하신다고 여기서 드러내시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
실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말한 대로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구도 가지고 있는 권세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 사함을 얻는 것은 우리가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며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고 거기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권세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중풍병자는 바로 죄인의 모습,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죽은 자와 같은 존재 그 모습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성령께서 일하시지 않으면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 개개인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자와 같은 상태로 죽은 존재임을 아는 자요 또한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걸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 움직여지는 자들이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 자랑하기 위하여 모이는 모임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