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누가복음 4:31-44 가버나움에서의 사역
13강 /
누가복음 4:31-44
가버나움에서의 사역
성경의 어떤 한 본문을 이해할 때에 우리가 쉽게 잘 하는 실수는 그 본문에 매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본문 안에서 한 구절 한 구절 풀어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생기는 문제점은 성경을 기록한 기록자가 주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거대한 그림에서 모자이크 한 조각을 가지고 그림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6:39)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거대한 하나의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거대한 하나의 그림으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다닥다닥 붙여진 모자이크 조각들을 설명함으로 그것이 전체 그림에서 어떤 부분인지를 이해하고 전체 그림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누가복음이 거대한 그림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의 그림을 보지 않으면 전체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누가복음이라는 작은 그림을 통해서도 전체 그림을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가복음이라는 작은 그림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보여주고 있기에 각 책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이라는 작은 그림은 전체 그림에 조화되어 이해될 때에 더욱 분명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누가복음과 또 그 중에서 지금 살펴보고 있는 4장은 전체 그림에서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이 한 부분으로써 또한 전체 그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읽고 이해하고자 하는 한 본문, 한 본문은 결코 따로 떨어진 조각이 아니라 전체 그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하나의 그림이고 또한 거대한 그림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본문을 대하더라도 그 본문 자체로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누가복음과 성경 전체의 흐름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은 4:16에서 말씀하고 있는 문맥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이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선포하셨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주의 은혜에 해와 연관하여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신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질병에서 고치심으로 누군가에게 매여 있고 포로 되어 있는 죄인들에게 해방을 주시는 구세주가 되심을 이적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31절에 보면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것도 우발적으로 어떤 날에 되어진 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이적을 행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자유함을 주시는 희년의 성취자가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분이며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완성자가 되시는 분임을 안식일에 이적을 행하는 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40절에도 보면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해가 진 시각부터 그 다음날 해가 질 때까지이다. 예수님이 해질 적까지 데려오는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이거나 다급한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쳐주어야 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면 그 다음날에라도 고쳐주시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가 질 때까지 다급하게 이렇게 행하신 이유는,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주의 은혜의 해(희년)요 진정한 안식이 되신다는 것을 안식일에 맞추어서 말씀하고자 하신 의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결코 말씀의 권세로 가르치신 것에 대하여 간과하지 않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31,32절).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의 권세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귀신이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귀신을 말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말씀에 굴복되지 않는 지식적인 차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믿음과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식으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은 지식을 자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 자된 자로 살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35절에서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에게 귀신을 꾸짖어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셨다.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이미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에 승리하신 전리품에 불과한 것이다.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36절)고 사람들의 반응을 누가가 소개하고 있는 것을 통해 보았을 때에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드러난 것은 놀라운 이적을 행한다는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와 능력이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가셔서 시몬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 것을 고쳐주신다. 3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여기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이 열병을 고치실 때에 열병을 꾸짖으셨다는 대목이다. 열병을 그냥 고쳤다고 표현하지 않고 열병을 꾸짖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35절에서 귀신을 향해 꾸짖으신 것과 같은 대목이다. 즉 열병을 인격체로 보고 어떤 세력을 향해 꾸짖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예수님은 단순히 열병을 고치신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병을 고치시는 것을 통해서 어떤 세력에 대하여 꾸짖으시며 그 세력을 물리치셨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41절에서도 보면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고 묘사하고 있다. 누가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을,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 사이에 넣어서 실제 인간을 안식하지 못하게 하는 배후 세력은 악의 세력이요 그것은 곧 귀신를 부리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질병이 귀신, 마귀로부터 온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인간이 이 땅에서 고통을 당하고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은 죄의 권세로 다스리고 있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결과라는 것을 예수님이 폭로하시는 것이다. 마귀에게 붙잡힌 바 되어 죄 아래 있는 것이 인간의 형편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정한 안식으로, 은혜의 해(희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죄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는 마귀의 세력에게서 놓임을 받게 하시며 죄의 포로 된 상태에서 해방을 주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를 이적(행동)으로 드러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43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 그 자체를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위해 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던 것이다(44절).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에 무지했다. 아니 복음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질병을 고치는 것에 급급하였고,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이 떠나시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다. 예수님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기들의 필요 때문에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죄인들의 모습이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42절).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죄인들의 습성이다. 그러나 언젠가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여길 때에는 과감하게 예수님을 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대로 취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성도는 죄에서 해방을 얻은 존재이지만 또한 주님께 붙잡힌 바 된 자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