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사무엘하 13:20-39 압살롬의 복수
■ 제16강(2013.4.28)
사무엘하 13:20-39
압살롬의 복수
다말은 암논에게 강간을 당한 이후 외롭고 슬퍼서 소리 높여 울었다. 그러자 오라비 압살롬은 다말을 자기 집에 살게 하였다. 압살롬은 암논이 미웠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윗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는 정도였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1절). 그러나 다말을 강간한 암논에 대하여 압살롬은 조용히 복수를 계획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압살롬은 에브라임 부근의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으며 잔치를 벌여 아버지 다윗과 모든 왕자들을 초청하기를 원했다. 다윗이 정중히 거절하자 압살롬은 암논을 비롯한 모든 왕자들을 보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마침내 암논을 비롯한 모든 왕자들이 압살롬이 벌인 잔치에 참여하였다. 압살롬은 종들에게 시켜 암논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즐거워할 때 적절한 기회를 봐서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압살롬의 명령에 따라 암논이 비참하게 살해되자 다른 왕자들은 놀라 모두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자 다윗은 이 일로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소문은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다 죽였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요나답이 나서서 압살롬이 죽인 자는 암논뿐이라고 다윗을 달랜다. 압살롬은 이방지역인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 피신했다. 달매는 압살롬의 어머니 마아가의 아버지로 압살롬에게는 외할아버지였다(삼하 3:3). 그곳에서 3년을 살았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결국 압살롬이 자기 누이가 강간을 당한 것에 대해 복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동정심이 생기는가? 아니면 다윗이 암논에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하였기 때문에 복수극이 발생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레위기에 보면 “너는 네 자매 곧 네 아버지의 딸이나 네 어머니의 딸이나 집에서나 다른 곳에서 출생하였음을 막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레 18:9)라고 하였고 또 “누구든지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그의 어머니의 딸을 데려다가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들의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자기의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가 그의 죄를 담당하리라”(레 20:17)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봤을 때 분명 다윗이 암논에게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잘못은 분명했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이 암논의 일을 방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죄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가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내릴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죄의 발생이 인간의 어떤 행동에 의해 발생하고 하지 않고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때에 내릴 결론이다. 따라서 다윗이 암논을 징계하지 않은 원인에 대한 결과로 압살롬이 복수를 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죄의 권세아래 붙잡혀 있는 상태로 어디까지 끌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다윗이 암논을 징계한다고 해서 죽여 복수의 대상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압살롬에게 복수의 마음이 사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복수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복수심이란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만큼 가해자에게 돌려주려는 마음이다.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또한 자신과 관계된 자들이 입은 피해도 포함된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또 다른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입은 피해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복수를 한다. 가해를 한 원인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결과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 결과를 내가 되돌려 주어서 해결하겠다는 의도가 바로 복수심이다. 가해자가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내가 복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복수심이란 인과응보의 한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압살롬의 죄는 단순히 암논을 죽인 살인죄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할 심판을 자신이 행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말씀을 무시한 죄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압살롬의 죄다. 뿐만 아니라 교활한 술수로 이 일을 배후에서 조언하고 또 사건의 전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요나답도 다윗을 위로하면서 자신은 이 일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행위가 단순히 강간을 부추긴 죄나 살인 방조죄 혹은 왕을 속이는 사기죄가 아니라 함께 어울려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한 것이 그의 죄이다.
다윗 역시 암논의 행동에 대하여 전혀 책망하지도 않았고 암논의 범죄를 살인으로 갚은 압살롬에 대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도망하여 3년이 지나니 그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였다. 이 일로 보았을 때 다윗은 장자인 암논이 왕의 자리를 이어가야 할 아들이었고, 또한 압살롬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혈통에 끌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고 있었다. 언약의 왕으로 세움을 입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다윗의 가정 내부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약의 왕으로 세우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핏줄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며 살고 있었다. 성경은 이러한 죄를 공개하여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히려 언약을 맞서는 쪽으로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죄라는 세력은 철저히 하나님의 언약과는 반대되는 권세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실로 다윗의 집안은 욕심에 이끌려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분오열된 상태의 집안이었다. 그러한 집안에서 다윗은 언약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 핏줄에 이끌려 그 혈통을 유지하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고 언약을 무시한 죄이다. 죄인의 핏줄을 옹호하고 그 혈통이 대대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맞서는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처럼 할례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
할례는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냄으로 인간의 생산 활동에 의해 후손이 유지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후손이 주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또 다시 죄인이 죄인을 낳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아닌 언약에 의해 하늘에서 보내신 메시아를 통해 죄를 해결하고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다윗이 핏줄에 이끌려 아들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통해 다말은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 실로 다말이 암논에게 했던 ‘이스라엘에서 마땅히 행하지 못할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삼하 13:12)는 말은 언약의 왕으로 세움을 입은 다윗이 할 말이 아닌가?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에 세워진 언약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시행되는 일에,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이끌려 아내를 얻고 그 결과로 얻어진 아들들에게 마음이 빼앗기고 있었다. 암논은 그저 인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기 욕정을 채우는 삶으로 살았다. 압살롬은 자기 누이가 당한 일 때문에 암논을 죽이는 복수극을 벌인다. 인간의 이러한 욕심 때문에 피해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는 자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 안에서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죄인들이 자기 삶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죄 없는 분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면 그분이 바로 언약을 위해 오신 분이다. 실로 죄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시기 위하여 죄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 아니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것이 바로 언약을 성취하는 일이고 하늘의 의를 이루시는 일이기 되기 때문이다.
10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0-11)
다윗을 비롯한 암논과 압살롬, 또한 요나답과 같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세상의 원리와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죄인들의 모습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며 곧 나 자신의 모습이다. 자기 핏줄을 고수하며 세상에서 당하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복수심으로 살면서 피해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가해자로 사는 우리의 죄, 그 문제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 대속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내가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영생을 누리는 자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있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