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누가복음 3:1-20 세례 요한의 사역
9강 /
누가복음 3:1-20
세례 요한의 사역
세례 요한의 출생이 예수님의 출생과 병행됨으로(1장)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내는 바와 같이 본 장에서 세례 요한의 사역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본격적으로 나타나시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예수님을 통한 천국 복음의 선포는 세례 요한의 출현으로 시작된다. 이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 때문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본격적으로 사역하시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때문에 세례 요한의 선포와 그의 사역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의 선포는 그 자체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등장과 연관해서 생각할 때에 의미가 제대로 밝혀진다.
본문 1절 이하에서 누가는 장황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때였기에 로마의 디베료 가이사(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린지 15년 되던 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직접 파견된 총독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리고 있었고, 로마 정부의 비호를 받는 헤롯이 갈릴리 지역을, 그의 형제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루사니아가 아빌레네를 각각 분봉왕으로 다스리던 때였다(1절).
또 유대 종교적 입장에서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2절). 우리가 아는 바대로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이 두 사람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어지럽고 혼란스러우며 비참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였다는 표현은 요한이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계시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게 하셨음을 뜻한다.
요한의 이러한 등장에 대하여 누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하였다. 이는 요한의 등장과 그가 하는 일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이 실현된 것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50:1-5).
누가는 죄악으로 멸망하는 이스라엘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보았다. 그리고 수백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미리 약속하셨던 말씀이 이제 이루어진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요한이 선포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표현하였다(3절).
그런데 요한은 죄 사함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 독사의 자식이란 단순한 말이 아니다. 당시유대 사회에서 독사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이다. 즉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기 백성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도 죄 사함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8절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들이 스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그것은 착각이라는 말이다.
요한의 사역을 4,5절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한다고 하였는가? 그것은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평탄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한 마디로 주님이 잘 오시도록 아스팔트 길을 놓는다는 말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마리아의 찬송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메시야가 오시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치시며 부자를 공수로 돌려보내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며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베푸는 구원을 이루신다고 하였다(눅 1:51-53).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여기서 비천하고 주리는 자란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비천하게 된 자며 하나님에 의해 주리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런 비천하고 주리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은 그것을 미리 보여주는 차원에서 길을 평탄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교만한 것과 같은 높은 산은 낮추고 비천한 자와 같은 골짜기는 돋워서 높여 길을 평탄하게 함으로 앞으로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해 어떤 구원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이 요한의 사역이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여기서 세리와 군병들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되는가?’ 하는 물음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 결코 어떤 생활을 하여야 되는가 하는 삶의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이 말한 것은 결코 세리나 혹은 군병의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세리란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 외에 더 많이 거두어들여 착복하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군병 또한 로마 정부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세리, 군병들만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들을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의 대표적인 자로 취급하였다는 점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에게서 소외당하는 그것이 비천하며 주리는 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들에게 ‘정한 세 외에 늑징치 말라!’, ‘강포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한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죄 사함의 회개를 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죄 사함의 회개를 얻게 되는 것은 세리가 자기 직업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니고 군병이 군대를 떠나는 식으로 자신의 직업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바꾸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요한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죄 사함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밝혔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16절). 자신이 죄 사함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은 진정으로 은혜 주실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신은 예비하는 자에 불과하지만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여 직접 알곡을 골라서 자기 곳간에 들이는 농부와 같은 사역을 예수님께서 하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누가 영생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하는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실 것이다.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를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18-20절)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이 전한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복음을 드러냈지만 사람들은 그 복음을 거부하여 오히려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이다.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복음을 복음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 그러기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실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1.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