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누가복음 2:21-39 율법을 좇아
7강 /
누가복음 2:21-39
율법을 좇아
21절에 의하면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지 팔 일이 되어 할례를 행하고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씨, 곧 그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표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은혜에 속하였음을 증거하는 표시였다. 이런 이유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창세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9-14).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는 성기의 표피를 잘라냄으로 이제 아브라함이 낳게 되는 약속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생식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시는 후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손 중에 궁극적인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할례를 통해 최종적으로 구원을 이루실 언약의 자손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3-1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흔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행하는 의식과는 달리 한 의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할례를 받으셔야 할 당사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할례 언약의 실체가 되신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땅에 대한 약속, 후손에 대한 약속, 복에 대한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취시키는 분이심을 누가는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할례를 받으신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언약하셨던 분이심을 확증하는 표였다.
레위기 12장에 기록된 출산 규례에 따르면 사내 아이를 낳았을 경우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게 되어 있으며 그 후 33일 동안, 즉 출산한 후 40일간 산혈이 있는 동안에는 산모를 부정하다고 하여 일체 성소 출입이나 성물에 접촉하는 것을 금하였다. 특히 여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에는 그 기간이 배로 늘어나서 80일간 부정하다고 하였다. 이 기간이 지난 후에 산모는 자신을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왜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성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모든 것이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율례를 통해 인간은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깊이 박혀 있는 근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율법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 역시 이러한 의식을 철저히 거쳐서 행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분이 언약의 실체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죄인과 같은 상태로 오시고 죄인들과 같이 되셨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22절)라고 하였고, 또 “주의 율법에 쓴 바”(23절)라고 하였으며 24절에서도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라고 표현하였으며, 39절에서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의 말씀을 그대로 준수한 것을 언급함으로 죄 없는 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셔서 철저히 율법이 요구하는 바에 순종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25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5,26절)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36,37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율법의 규례대로 행하시기 위하여 성전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가 있었다. 시므온과 안나라는 사람이었다. 시므온과 안나는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볼 때에 나이가 많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누가가 특별히 두 노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일을 기록함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두 노인이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기다려왔는가 하는 것을 기록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시므온을 두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안나 역시 과부로 84년을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필요한 자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인간적인 것이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위로가 되는 유일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곧 구속이요 구원이었던 것이다(38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철저히 이스라엘의 무관심과 방관 속에 이루어졌다. 왕이나 제사장,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하는 서기관들조차 어느 한 사람도 예수님의 오심을 환영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오심을 맞은 사람들은 경건이나 지식과는 거리가 먼 미천한 목자들이었고, 사회적으로는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진 과부였으며 생활에 힘을 쓰지 못하는 노인네였던 것이다. 누가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생명의 나라는 자기가 스스로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며, 지식과 지도층으로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그들에게 멸시받고 버림받는 비천한 자들이 주님을 맞이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남겨두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주재여!”, 즉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언약의 말씀대로 성취하셨음을 노래하고 주의 이루실 구원을 경험한 것처럼 노래하고 있다(30절).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셨던 것으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32절)이라고 찬송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을 이스라엘로 보신다는 것을 알고 시므온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34,3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성도는 자기 행위나 자기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진짜 이스라엘로써 주의 구원을 노래하도록 남겨진 자이다. 나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남겨진 자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