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14.시편 51:1-19 죄악 중의 다윗의 찬양

불편한 진리 2014. 11. 20. 13:21

14(2013.4.7)

시편 51:1-19

죄악 중의 다윗의 찬양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사무엘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고 이제 우리는 밧세바를 범한 이 사건과 연관하여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시편 51편을 상고하고자 한다. 시편 말씀을 나눌 때마다 드리는 말씀이지만 시편을 단순히 구약 성도들의 신앙적 고백이나 찬양을 시로 표현한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드러내고 그 언약을 통해 보내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가를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를 주셔서 고백하고 찬양하게 하셨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해석되어야 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표제가 붙어 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들을 언제든지 마음대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다(삼하 12:1).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그러면 다윗이 자신의 죄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고백하고 있는가?

4절에 보면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죄를 범했으니 사실 우리아와 밧세바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9-10)고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무엘하 12:13에서도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하였었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다(삼하 12:7-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죄를 범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범한 죄였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윤리 도덕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피해정도가 아니다. 사람에게 범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범한 죄이기에 사람과 상대하여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셔야 되는 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죄가 어떤 것인가를 철저히 보여 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다윗이 범죄할 때에 잠시 두고 보신 것이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았기에 3절에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것은 자신이 죄에서 단 한번이라도 떠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행위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사탄의 세력이요 권세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다. 죄를 행위의 문제로만 본다면 악한 행동이 있을 때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즉 악한 행동이 있을 때는 죄인이지만 반대로 선한(물론 이 선하다는 기준도 자기중심적 기준이고 세상적 기준의 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동이 있을 때는 의인으로 여기게 된다.

오늘날도 일반적으로 이런 관점으로 죄를 생각하고 있다. 십일조 하지 않고, 성경 읽지 않고, 기도 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회개라는 것을 하지만 십일조를 잘하고 열심히 성경 읽으면서 기도하고 전도도 하고 있다면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기는커녕 하나님께 복 받을 자로 여긴다. 즉 회개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깊은 인식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기도할 때에 죄인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이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라고 고백한다. 죄 중에 잉태하였다는 것은 죄 덩어리로 세상에 났음을 뜻한다. 이것이 아담 이후 이 땅에 태어난 우리의 본질이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때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다. 이제까지 다윗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죄를 생각하였다. 다윗은 왕의 입장에서 자신을 대적하고 자신에 대하여 거부하는 존재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자신은 죄와 관계가 없고 오직 외부에 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자기가 늘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고 표적으로 여겼던 그 죄 자체를 바로 자신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의 세력에 붙잡혀 있고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위치에 존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자, 긍휼에 의해서라고 고백한다(1). 결국 왕이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리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윗은 범죄한 일을 통해 자신 역시 죄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은 자로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다윗은 자신이 범죄하게 된 것, 아니 하나님께서 자신이 범죄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신 이유를 드디어 깨닫고 그것을 이렇게 고백한다.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12-13). 왕이 위치한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를 누구보다도 절감하며 오직 긍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전하고 가르쳐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것이 곧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임무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깨달았다.

여기서 구원의 즐거움이란 단순히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인한 즐거움이 아니라 죄 때문에 구원이 전혀 가능하지 않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한 일하심으로 말미암은 즐거움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윗이 모든 범죄자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주의 도도 역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주의 의가 되는 것이다. 이 주의 도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어 서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 앞에 서게 하시면서 죄를 보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인 됨을 철저히 자각함으로써 주의 십자가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성취자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을 노래하고 높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 자체를 죄에서 용서받고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만 생각한다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 구원에 매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고 말하는 다윗 마음이 어떠한가?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꺾으신 뼈’(8)로 즐거워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신의 죽음을 꺾으신 뼈로 표현하여 하나님께 범죄한 자신이 온전히 죽어진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한 심령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라는 고백을 하였다. 상한 심령은 오직 주의 의만 의지하는 심령을 말한다. 그 무엇에도 기대를 걸지 않고 주님의 의에만 모든 기대를 거는 그 심령이야 말로 상한 심령이고,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러한 심령이 되도록 만드셨던 것이다.

또한 다윗은 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이 되었을 때 자신의 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11) 않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죄 가운데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기에 의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또한 오직 하늘에서 주어지는 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음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려지는 번제를 원하지 않는 분이다(16). 따라서 언젠가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실 것이다. 그분이 바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완전한 제사였다.

 

5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0:5-12)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상한 심령의 자기 백성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때에 다윗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속의 은혜를 입는다.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가 소멸되고 생명을 누릴 수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