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사무엘하 12:1-31 다윗과 나단 선지자
■ 제12강(2013.3.24)
사무엘하 12:1-31
다윗과 나단 선지자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좋게 보셨을 리가 없다. 11:27에서 이미 그 전제를 언급하였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보시는 관점은 어떤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셨다. 그리고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성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엄청나게 많았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딸과 같이 귀한 암양 새끼 한 마리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부자는 자기의 많은 동물들을 두고 가난한 자의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빼앗아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해 대접을 했다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크게 진노했다. 그런 못된 인간은 더 이상 살려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그 부자를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하고 부자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그가 빼앗긴 것의 네 배를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다윗을 발견한다. 그렇게 율법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율법을 어기고 언약의 말씀과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단 선지자는 그 부자가 바로 당신 다윗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왜 나단 선지자는 왕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해이해졌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또 간음하였다거나 살인하였다고 다윗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나단 선지자는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은 것으로 지적하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사건의 맥락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분명하게 정리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보자 충동적으로 범했고 그것을 덮으려고 하다보니 더 발전하여 우리아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앞 장의 강론에서 말씀드렸듯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권세인지 다윗이 그 죄에 의해 끌려갈 대로 끝까지 끌려간 것을 보여 주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결코 다윗의 범죄가 우발적으로 발생하였고 그리고 그 다음 상황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처음 행동을 할 때에 이미 우리아를 죽일 계획까지 마음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9-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0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다윗에게 왜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였다고 사건의 순서대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왔다고 보고 말씀하신다.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을 때 사람을 보내어 신원을 알아보라고 했고 그래서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 여인이 이방인 우리아의 아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다윗은 이미 그 여인을 아내로 삼기로 마음먹고 일을 진행한 것이었다. 이방인의 아내였기에 자신의 행동에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아가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그 아내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왔다고 보신다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들은 다윗이 진노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7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8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7-8절)라고 먼저 말씀신다.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그리고 왕으로 세우신 후에도 다윗에게 필요한 것을 다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직도 부족하여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욕심을 채웠고 그러면서도 이방인의 것이기 때문에 전혀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이 행동하였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다.
12절에서 하나님께서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라고 하였다. 다윗의 범죄가 ‘은밀히 행하였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뜻은 다윗이 이 범죄를 아무도 모르게 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고 당당하게 자신이 있는 궁으로 밧세바를 데리고 와서 동침하였으며 또 요압을 통해 우리아를 죽이도록 하였는데 은밀한 것인가? 그의 행동이 은밀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의 본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드러나지 않게 행동하였다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다윗 자신의 행동 속에 담긴 의도와 목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간파하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다윗의 범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라고 지적하신다(9,10절).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처사였다. 다윗은 이방인의 것을 뺏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아의 아내를 도적질 한 것에 대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 다윗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우리아라는 이방인을 가난한 자, 약자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평범한 목동에 불과하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시고 사울의 손에서 늘 그를 구원하셨고 그에게 많은 것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때까지 이렇게 이끄신 이유는 그를 통해 언약의 뜻을 드러내시고 언약의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스라엘과 이방 세계에 알리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죄에 대한 잘못된 사고방식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원리와 하나님의 뜻만 옳은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온전히 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다윗을 이끌어 오셨다. 그럼 의미에서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였다. 다윗은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언약의 원리가 죄의 가치보다 죄의 개념보다 죄의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며 옳은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많이 배운 자요 가장 많이 아는 자요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자로 세워진 자였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가진 자의 편에 있었다. 가진 자였고 부자였기에 없는 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이방인에 대하여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왕이라는 힘으로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았다. 이러한 모습은 언약의 왕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 주는 왕이어야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말씀할 때 등장하는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은 열 가지 계명을 말씀하신 것(출 20:1-21)과 연관되어 출애굽기 20:22-23:19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소위 ‘약자 보호법’이라고 한다. 이는 레위기에서도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우리가 그 내용을 다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배경과 근거로 이것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열 가지 계명을 말씀하신 것 속에서도 드러나지만 레위기 25:35-55에 말씀하시는 약자, 가난한 자에 대한 말씀의 배경을 출애굽과 연관해서 말씀하셨다. 즉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38 / 참고 25:42,55, 26:13, 신 15:15 등)라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이 가난한 상태에 있었고 애굽에서 약자의 상태에 있을 때에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셨던 것처럼 다윗이 약자로 무시당하는 자로 있을 때에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를 분명히 알지 못했기에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다. 그래서 다윗은 이런 점에서 온전한 언약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다. 그는 죄의 지배를 받고 죄의 권세에 매인 자였기 때문이다. 사무엘하 11, 1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언약의 왕이 오셔야 한다. 죄가 상관없는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왕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야 한다. 그래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희년을 선포하셨다. 희년을 선포하신 말씀에서 가난한 자, 약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자유를 얻게 될 언약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 일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7-21)
약자보호법이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약자로서 경험해 보았지만 왕의 자리에서 아직 약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죄가 그를 이끌어 약자를 보지 못하는 자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약자를 보게 하셨고 약자에 대하여 알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다윗 안에(후손으로) 진정한 약자를 아는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가난한 자 없는 자 약자로 오셔서 친히 그들과 함께 하셨고 고난받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여 자기 백성들을 죄의 권세에서 놓임 받게 하셨다. 우리는 그분이 이루신 언약을 보고 감사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