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08.요한복음 3:22-26 하나님의 보내신 이

불편한 진리 2014. 11. 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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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보내신 이

요한복음 3:22-26


교인들에게서 이런 말을 가끔 듣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못사니까 덕이 안 된다.” 정말 그렇습니까?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는 나의 입장에서 무엇을 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되고 못된다고 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 기준을 세상에 두고 있으면서 하나님 영광을 운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생각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며 세상의 원리를 복음에 혼합시켜 놓은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를 절묘하게 지적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32).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기까지 인간들은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자신들의 병이 이렇게 심각한 것인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하게 죄에 오염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31), “하나님의 보내신 이”(34)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으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독생자이십니다.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보내시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조치를 취하시지 않았더라면 인간에게는 도무지 희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입니까? 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했습니까? 인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온통 다 썩어 있습니다. 전혀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수술 정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새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처방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기존의 인간을 적절히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쓰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창조가 없으면 안되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영생을 취하는 유일한 길입니다(36).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스스로가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에 항복된 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사실 요한복음 4:2에 보니까 예수님이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에 의해 주도되어진 일임에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때 요한의 제자와 어떤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논쟁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와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 불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님이 세례를 주매 거기로 가서 세례를 받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다만 메시야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자이며 또한 너희들이 그것을 증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30)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번성, 부흥, 발전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주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합당한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사업이 잘됨으로 또는 내가 직장에서 진급이 잘되며, 나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쇠하여지는 것이 바로 주님을 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흥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목표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성공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거기서 죽는 죽음이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성공이고 목표이며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흥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세례 요한이 흥하는 것으로 되지 않고 쇠하는 것으로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24절에 의하면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찌하여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는 사람들이 많으냐?”는 질문이 왜 나오고 거기에 대해서 요한이 답변을 해야 하는 일이 왜 있어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죽어야 예수님 역시 죽음을 통해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운명으로 그렇게 고난을 받고 죽는 선지자임을 제대로 드러내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죽음은 곧 예수님이 구약 선지자의 온전한 성취자요, 실체로 오신 것임을 드러내는 일에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흥함을 드러내는 것은 곧 그의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쇠함인 것입니다. 본래 인간은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의 아들이 증거할지라도 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성경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로, 우리의 의는 모조리 거부될 수밖에 없기에 먼저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주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발전, 흥함, 번성 이런 것들로는 결코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상태일 때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것을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 때문에 손해를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의 흥함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보다 신자들이 더 가지는 것으로 그들의 힘을 누르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항상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과는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고 그에게 감격된 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뒤로 사라집니다. 위대한 세례 요한까지도 뒤로 물러가게 하는 것이 영생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아직 영생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참 말씀 좋다!”, “그 교역자 설교 잘 하네!” 하는 것으로 그냥 끝나는 것 같습니다. 말씀에 따르는 회개가 없고 말씀에서 요구하는 순종이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의한 감격은 더더욱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성경공부 하는 것 자체를 신앙생활로 생각합니다. 성경공부가 신앙생활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29). 오직 신랑의 들러리가 자신에게는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기쁨이었습니다. 주님이 오직 나의 기쁨이요 만족이 되심을 늘 고백하면서 살아갑시다<http://blog.daum.net/revealer 1996721/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