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하

09.사무엘하 9:1-13 다윗과 므비보셋

불편한 진리 2014. 11. 13. 21:07

9(2013.2.24)

사무엘하 9:1-13

다윗과 므비보셋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주신 것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권을 더욱 분명하게 세우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하셨다. 그 후에 다윗은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다윗은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1)라고 말하였다. 찾아보니 사울 집안에 종인 시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시바가 다윗에게 나왔을 때 다윗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3).

그런데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3)라고 말한다. 시바의 이 말은 다윗에게 절름발이 한 사람 정도 남았는데 그는 왕에게 위협적인 인물이 되지 못하니 걱정하지 말하는 뜻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이방 족속의 왕들은 왕권을 잡으면 대립되었던 집안을 모조리 다 몰살시켰기 때문에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은 이후 다윗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다윗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자 사울 왕의 고향 사람들은 모두 공황 상태였다. 어떤 사람들은 블레셋의 군사들이 사울과 관련한 사람을 모두 죽일 것이라며 두려워했고 또 다른 이들은 사울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다윗과 그의 추종자가 두려웠다. 그들이 복수의 칼을 든다면 제일 먼저 사울의 고향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사울의 집과 가족들을 보살피고 관리했던 책임자들은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집안에 있는 귀중품과 식량을 챙겨 산으로 피신했다. 당시 집에는 전쟁에서 죽은 요나단의 다섯 살 난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는데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서두르다 실수로 아이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그 후로 므비보셋은 평생 두 다리를 저는 장애자로 살고 있었다(삼하 4:4).

시바는 므비보셋이 로드발에 있는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보고했다. 로드발이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사무엘하 17:27을 보면 로드발은 요단 강 건너편 마하나임 부근에 있었던 성읍으로 추정된다. ‘로드발이란 목초가 없다는 말인데 그곳이 별 볼일 없는 황무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마길은 사무엘하 17:27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압살롬의 난을 피해 마하나임에 도피한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후히 대접했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마길은 재물도 넉넉히 가진 자였고 곤경에 처한 자를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자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다윗은 종들을 시켜 마길의 집에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게 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그의 부친 요나단을 인해 그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말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왕자 중 한 사람처럼 왕궁에 살면서 왕의 식탁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고 시바를 불러서 그를 도우며 섬기라고 지시했다. 시바는 다윗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했다. 므비보셋은 이로 인해 궁전에 머물면서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식탁에서 먹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므비보셋을 데리고 오게 한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과연 다윗이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므비보셋을 불렀는가? 어떤 학자는 다윗이 므비보셋을 왕궁에 머물게 한 것이 아직도 사울을 지지하며 사울과 연관된 지파에 속해 있는 자들이 혹시나 있을 반역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취한 조치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이 맞다고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윗이 사울의 집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려고 했다면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벌써 시행했어야 옳다.

길보아 전투 당시에 므비보셋은 고작 5세에 불과했지만(삼하 4:4) 이제 그는 어엿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미가라는 어린 아들이 있다고 성경은 언급한다(12). 따라서 당시에 므비보셋은 최소한 20세는 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15-20년 이상이 지난 뒤였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통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였다. 한 참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다윗은 요나단과 맺은 언약(삼상 20:14-15,42)을 기억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기 왕권을 확고히 하는 차원에서 행한 행동이든 아니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지키도록 기억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실하고 너무도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에 므비보셋을 돌보게 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은총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한 사건을 일으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모습을 비추어 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다윗도 므비보셋도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은총, 은혜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도구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은혜는 언약의 성취자가 오시면 온전히 드러나고 밝혀질 것이다. 그것을 다윗 왕권 안에서 미리 앞서서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윗의 왕권을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로 높임을 받은 존재이다. 절름발이요 지리적으로도 변방 황무지에 내몰려 있었던 므비보셋을 다윗의 상에서 함께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높여주신 은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 덕분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보시지 않고 다만 약속을 인하여 찾으시고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은혜요 은총이다.

로마서 6:14에 의하면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했다. 이것이 성도의 현실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것은 법이 아니라 은혜이다. 만약 법으로 다스림을 받았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을 수 없다. 대신 우리에게 주어질 몫은 심판일 수밖에 없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요나단으로 인하여 은총을 베푼 것은 다윗의 왕국이 어떤 속성의 왕국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다윗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에 매여 있어야만 되는 나라요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나라요 언약의 백성이다.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드러났을 때에 므비보셋의 반응은 어떤가? 8절에 보면 다윗의 은총을 입은 므비보셋이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말한다. 므비보셋의 이 고백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에 사로잡힌 자의 고백이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죽은 개로 표현하였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 자신을 그토록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다. 므비보셋에게는 다윗으로부터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다윗을 위해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쓸모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므비보셋은 두 발을 다 쓰지 못하는 자였다. 두 발이 모두 절름발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13절 마지막에 이것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직 다윗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 때문에 주어지는 은혜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9-30).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이다. 우리는 이 은총 앞에서 므비보셋과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죽은 개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의 가망은 전혀 없는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왕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된 존재로 높임 받게 되었다. 누구 덕분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 그렇다면 이제 삶의 모든 초점, 삶의 모든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