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사무엘하 6:1-23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 제6강(2013.1.27)
사무엘하 6:1-23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그곳을 다윗성으로 명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오고자 하였다. “1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의 또 다른 이름)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1-2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법궤는 유다 산악 지역의 바알레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어 있었다. 다윗은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 위하여 30,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를 동원했다.
그리고 법궤를 옮기는 일들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3절)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갑자기 날뛰어 법궤가 바닥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웃사가 법궤를 잡았으나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웃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다윗은 이 일로 마음이 상하여 그곳을 웃사의 벌이라는 뜻으로 ‘베레스웃사’라고 하였다.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웃사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가 용감하게 법궤를 손으로 붙잡아 위기를 넘겼다고 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법궤를 손으로 붙잡은 웃사를 그 자리에 죽게 하셨다. 이 모든 상황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게 하셨다. 그것도 나곤의 타작마당이라는 넓은 자리에서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아니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웃사가 어떻게 얼마만큼 잘못한 일인가 라고 하는 측면에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이 일은 웃사나 아효 혹은 아비나답이 주도하였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의 주도권을 가진 자는 다윗이었다. 다윗이 이 일을 벌이고 주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건의 현상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다는 것이 어떤 문제이며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시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초두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서 패했다고 생각하여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지만 이스라엘의 생각과는 달리 전쟁에도 패하고 언약궤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가져다가 자기들의 신전에 갖다 놓았는데 자기들의 신상이 쓰러지고 백성들 가운데 많은 질병들이 발생하자 여호와의 궤 때문에 발생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회의를 거쳐 궤를 이스라엘에 반환한다. 이때 블레셋이 썼던 방법이 암소의 수레에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는 것이었다. 지금 이스라엘이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면서 이방인들이 썼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때 법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 이스라엘이 환영하면서 맞아들였던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 나가서 패배하는 여호와의 법궤,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되는 법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더구나 일단 돌아온 법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에 두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여 열어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지도 못했던 여호와의 궤가 도리어 백성들을 죽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거부하였다. 결국 법궤는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방치되었다.
그런데 여기 이제야 다윗이 왕이 되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경고를 하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을 뛰게 만드셨고 그 일을 통해 웃사를 치심으로 다윗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법궤를 옮기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보여 주고 말씀하고자 하시는가?
그러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다윗이 법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는 것은 신앙적 목적이거나 언약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것이 “9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10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9-10절)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만일 다윗이 법궤를 옮겨오는 것이 언약적 의미의 목적에서 한 것이었다면 끝까지 법궤를 간수했어야 했다. 웃사가 죽는 일이 발생하였을 때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근본부터 따지고 정리해서 어떻게 하든지 예루살렘으로 옮겨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 않고 궤를 옮기는 것을 바로 포기해 버린다. 그리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방치한다. 이 기간 동안 다윗은 법궤를 옮겨가기 위한 어떤 방도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간에 있은 일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언급한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11절).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을 점령하고 있을 때에 그 집에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씀한다. 사람의 아무 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복이 주어졌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보여 주셨다. 복이 어떤 형태로 드러났는지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다윗이 귀에 들리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윗은 이방인 블레셋 사람들이 썼던 방법이 아니 율법의 말씀에 근거한 정상적인 방법으로 법궤를 메어 예루살렘으로 옮긴다(13절). 다윗이 궤를 옮겨오려고 했던 것이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가진 것이 많은데 여호와의 궤가 개인의 집에 방치되어 있으니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여호와를 도와줄 때가 되었고, 여호와를 높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거부하고 계신 것이었다. 다윗이 여호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여호와를 지키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제까지 높이셨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언약의 자리에 이끌고 계셨기 때문에 다윗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 일을 통해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들을 날뛰게 만드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신 것이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여부스 족속들로부터 빼앗아 명실공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안치되는 것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일로 계시하셨던 모리아산이 곧 예루살렘이 되는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는 시점에서 적어도 다윗의 정치적인 목적과 방식은 거부되어야 했다.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 확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궤란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즉 언약궤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임재하여 언약을 주셨고 친히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개인적인 욕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옮겨놓고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갈에게 내린 저주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보여 주고 있다. 법궤를 옮기는 그 자리에서 왕의 체신을 생각하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왕의 면모를 생각하였기 때문에 미갈에게 자식이 없는 저주가 내려짐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거부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말씀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미갈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21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21-22절). 다윗이 한 일은 인간 왕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언약이 성취되는 일이기 때문에 다윗은 기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뛰었던 것이다.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를 이용하여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미 마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이용해서 자신의 삶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건강과 부와 잘됨을 위해 이용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은 오직 언약의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삶이어야 한다.
법궤를 옮기고 준비된 장막에 안치되자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는 것은 다윗 자신의 죄를 보았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윗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법궤를 옮기려고 했던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기에 법궤를 옮긴 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번제와 화목제사를 드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친히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부름 받은 존재일 뿐이며 그 언약을 위해 다윗은 앞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보여 주기 위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생각에 의해서나 다윗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것이지 다윗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에 있어서 결코 자기 사적인 욕심이나 개인적인 취향에 의해 이스라엘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언약의 왕이 보여 주어야 할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경고를 주시며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오벧에돔의 집에 내리신 복이 바로 언약의 왕이 다윗과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내리실 복이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행위에 의해 좌우되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리신 복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리신 신령한 복(엡 1:2)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며(엡 1:9) 그것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은혜이며 선물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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