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사무엘하 3:1-39 다윗과 요압 그리고 아브넬
■ 제3강(2012.12.30)
사무엘하 3:1-39
다윗과 요압 그리고 아브넬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는 1절의 말씀은 2장에서 말씀하고자 한 내용의 결론이기도 하면서 또한 3장 이하에서 전개될 내용이 서언이기도 하다. 다윗을 왕으로 세워 어떤 모습이 언약의 왕에 부합하는 모습인지 또한 어떤 모습이 언약의 왕에 합당한 모습인가를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 왕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울의 집안을 따르는 자들이 다윗의 집안을 따르는 자들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거부하며 반항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다윗 왕가를 거부하는 것이나 실제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사울 집안을 따르는 자들은 점점 약해져가는 반면 다윗 집안을 따르는 자들은 점점 더 강해졌다.
사무엘하 3장에 와서 갑자기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아들들을 소개한다(2-6절).
1. 아히노암 - 암논
2. 아비가일 - 길르압(다니엘 / 대상 3:1)
3. 그술 왕의 공주 마아가 - 압살롬
4. 학깃 - 아도니야
5. 아비아달 - 스바댜
6. 에글라 - 이드르암
그런데 다윗의 아들 여섯을 소개할 때 여섯 아들의 어머니가 다 다르다. 이미 다윗은 아내가 여섯이란 의미이다. 성경이 왜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을까? 다윗이 훌륭했고 모든 일들을 잘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가? 우리는 다윗에 대하여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윗이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고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크게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후에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만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것으로 생각한다. 신명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왕 제도를 시행할 때에 왕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세 가지 말씀하셨다.
16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6-17)
그 세 가지는 말을 많이 두지 말라는 것과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이며 또한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는 것이었다. 세상의 기준에서 왕은 식구를 많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왕족이 든든해지고 신하들의 반란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의 왕 제도는 그렇게 완벽하게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왕이 아내를 많이 두기 때문에 생기는 왕족 내부에서의 권력에 대한 암투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왕을 구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고 이러한 세상의 왕정 제도에 대한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미리 모세를 통해 말씀해 두신 것이었다. 왕이 된 자는 권력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아내를 많이 두어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 명하셨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언약의 왕은 세상의 왕과 다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언약의 왕이란 자기 자신의 잘남을 내세우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자여야 한다. 왕을 세우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있을 때 사울 왕가에는 이스보셋이 왕으로 세워졌지만 불안한 상태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사울 왕조의 실권은 군대장관 아브넬이 잡고 있었다고 성경은 언급한다(6절). 아브넬은 자신이 사울의 왕권을 물려받기라도 한 것처럼 사울의 후궁 리스바를 취하여 권력을 과시하였다. 그러자 이스보셋이 그것을 알고 아브넬의 불륜을 강하게 책망하자 아브넬은 분노하여 사울 왕조로부터 등을 돌리겠다고 선언한다.
아브넬은 “9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10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9-10절)라고 말하여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이 다윗을 통해 성취될 것을 부지중에 말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있다.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는 아브넬이었다.
그리고는 아브넬은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윗과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자 다윗은 순순히 아브넬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지 않고 특별한 조건 하나를 제시한다. 과거에 자기의 아내였다가 빼앗긴 사울의 딸 미갈을 데려오라는 것이었다(13-16절). 사무엘상 25:44에 의하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에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주었다. 미갈이 혼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살고 있는데 다윗이 미갈을 데려오라고 하는 것은 약탈 행위였다.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사울의 집안과 원수지간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 전체에 내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비록 유다 지파의 왕이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둘로 갈라진 나라를 화합하며 통합하려는 마음으로 적장 아브넬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이미 여섯 명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딸 미갈을 기어코 빼앗아와야 하는 다윗의 행위는 다분히 사울 집안과 원수가 아니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다의 왕으로서 왕권을 행하는 다윗의 모습이었다.
아브넬이 부하 20명을 데리고 다윗에게 오자 다윗은 잔치를 열었다. 잔치가 끝나고 아브넬이 돌아간 후 요압과 다윗의 부하들이 전쟁터에서 왔을 때에 요압에게 이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요압은 다윗을 찾아가 왜 아브넬을 받아들였는지를 따졌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불러 그를 칼로 찔러 죽인다. 요압의 이러한 행위는 동생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27절). 다윗은 아브넬이 죽은 후에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하여 다윗은 요압에 대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묵인한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39절).
아브넬은 아직 다윗 편으로 온 것도 아니었고 다윗을 위해 행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다윗이 아브넬을 위해 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요압을 통제할 수 없었던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밖에 없었다. 다윗이 우는 이유는 아브넬이라는 귀한 장수 한 사람을 잃어서가 아니라 너무 힘이 없고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결국 아브넬을 위해 탄식하며 울었던 이것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쌓는 것에 불과하였다.
목동에 불과하였고 아버지와 형제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던 다윗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것은 책임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라고 위임을 한 것이 아니라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뜻인 언약을 드러내고 가르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이익이 더 앞섰고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세우는 일이 더 중요했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사울 왕가의 이스보셋 쪽이나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즉 다윗이나 요압, 아브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언약의 왕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이끄시며 지키시며 인도하시는가를 드러내어 언약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이스보셋은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왕이 되는 일이 버려두셨던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도록 이끄셨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과 명령을 따라 움직여지는 왕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그 언약이란 바로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 세움을 입은 왕이지만 그가 영원한 왕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편 110:1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고 하였다. 이 시편의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왜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향해 다윗이 ‘주’라고 하였는가? 다윗이 바라본 것은 바로 앞으로 오실 언약의 성취자이신 메시아를 바라보았고 그분이 더 크신 분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윗이 ‘주’라고 한 그분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이라고 밝히셨다. 성경의 강조점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다윗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같은 사람도 언약을 위한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에 있다.
다윗은 우리의 모델이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이다. 하나님은 한 개인 다윗을 세우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약하고 세상에서 왕이라는 자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 다윗을 왕으로 세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앞으로 오실 메시아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언약을 성취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다윗과 같은 자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언약의 왕되신 하나님께 굴복하게 되듯이 우리 역시 십자가에서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성령께 붙잡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로 굴복된 것이다. 성도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된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