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사무엘하 2:1-32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
■ 제2강(2012.12.23)
사무엘하 2:1-32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
사울 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이스라엘을 떠났던 방랑 생활이 종료되는 시점에 와 있다.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던 일들과 광야와 이방 땅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언약의 왕으로 세워져가는 연단의 과정이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과 같이 말이다. 쉽게 가나안 땅에 있는 자를 선택하시지 않고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먼 곳에 있는 자를 선택하셔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시고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리까지 이끌어 오셨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많은 고난을 겪게 하셨다.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때에도 다윗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물었다.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하나님께 물었다는 말씀은 단순히 다윗이 기도하였다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이는 또한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끌어 오셨다는 점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것은 사울이 폐위되고 다윗이 본격적으로 등극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시며 다윗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도하신 연장선 위에서 철저히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살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 구약시대가 훨씬 신앙생활하기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만 하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환상도 보여 주신 때였기에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직접 해결하시고 심판하시는 일들이 많았다는 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셨기 때문에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다 드러나 있고 또한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에 천국의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하도록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블레셋 땅에 머물고 있던 다윗에게 그곳을 떠나 이스라엘 땅 헤브론으로 올라가도록 명령하셨다. 헤브론은 다윗이 스스로 선택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곳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다윗은 가족과 추종자들을 이끌고 헤브론에 도착하자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다(4절).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가운데서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된다는 것은 많은 아쉬움을 갖게 했을 것이다. 비록 가장 인구가 많은 지파라고는 하지만 남쪽 한 지파만의 왕국을 세우는 것은 이스라엘을 나누어 고착화시키는 무분별한 정치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궁을 받을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구체적으로 준비하도록 다윗을 인도해 오셨다.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성읍 중의 하나인 그일라 사람들이 추수하고 곡식을 저장해 놓은 타작마당을 기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구원해 준 적이 있었다(삼상 23:1-5). 또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글락에 머무는 동안 아말렉 군사들과 싸워 가축들을 비롯하여 많은 탈취물을 얻었을 때에도 다윗은 모든 유다의 장로들에게 전리품을 예물로 보내면서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삼상 30:26)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을 위해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철저히 준비시키신 일들이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될 지파의 특수성을 하나님께서 나타내고 계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원한 왕 사울을 폐위시키고 하나님께서 원하신 왕 다윗이 이방 땅에 거하다가 이스라엘로 들어왔을 때에 가장 먼저 유다 지파가 받아들이게 하시고 점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유다가 이어갈 메시아의 계보가 확보되어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이 행한 통치의 내용에서 잘 볼 수 있다. 5-6절에 보면 “5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령들을 보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 그를 장사하였으니 여호와께 복을 받을지어다 6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라고 하였다. 사울을 장사한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한 이것이 다윗의 첫 번째 통치 모습으로 앞으로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가 어떤 모습을 담고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다윗은 1장의 애가에서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21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울의 방패가 버린바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들이 들고 있던 방패가 버린바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을 방패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사울을 방패로 이해한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역할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왕의 역할인데 이 방패가 깨어진 것으로 슬퍼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왕으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사울에게서 드러난 통치 행위처럼 다윗이라는 원수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왕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이고 역할이다. 이러한 참된 왕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벽하게 증거되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섬김과 봉사를 보여 주셨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지켜내시는 역할을 완벽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유다 지파의 왕이 된 다윗은 7년 7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있으면서 백성들을 다스렸다(11절).
사울 왕의 뒤를 이를 왕자는 원래 요나단이었다. 그러나 요나단뿐만 아니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까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니 다른 대안이 마련되어야 했다. 사울 왕의 편에 서 있던 자들은 다른 이방 족속들이 하는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울 왕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이스보셋은 마흔 살이었고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밝히고 있다(10절).
이렇게 하여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는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되었다. 사울 왕을 세습한 이스보셋과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워진 다윗! 이런 상황이 되다보니 두 세력 간에는 군사적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기브온에 있는 한 못을 사이에 두고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은 아브넬이었고 다윗의 군대장관은 요압이었다. 젊은이들 열 둘을 내세워 서로 죽이고 죽는 게임을 한다. 이것을 계기로 더욱 전투는 맹렬하였고 이스보셋의 군대는 360명이나 전사한 반면 다윗의 군대는 아사헬과 19명이 죽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이스라엘 내부의 전쟁이 있어야 하는가? 그냥 쉽게 모든 이스라엘이 다 다윗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께서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 주시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유다 지파의 왕이 되게 하시고 사울을 따르는 자들과 이스라엘 안에서 싸우도록 하시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그냥 다윗을 왕으로만 세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보여 주시고 설명하시기 위해 모든 일들을 꾸며가신다. 즉 하나님은 이 내부의 전쟁을 통해 인간들의 싸움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고 언약의 왕이 누구이며 왜 필요한가를 말씀하고자 하신다. 17절에 보면 이미 다윗의 부하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절 이하에 보면 패하여 도망하는 아브넬을 아사헬이 끝까지 뒤쫓아 가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쟁에 이미 패한 자들인데 그들을 죽이겠다고 쫓아가는 아사헬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20-21절을 보면 “20 아브넬이 뒤를 돌아보며 이르되 아사헬아 너냐 대답하되 나로라 21아브넬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아사헬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그의 뒤를 쫓으매”라고 말씀한다. 아브넬이 그만 쫓아오기를 간청한다.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는 것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말고 소년을 잡아 그 군복을 뺏는 것으로 대신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사헬은 결코 아브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보았을 때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과 함께 사울을 피해 도망하며 떠돌아 다녔던 억울함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다.
결국 아브넬에게 아사헬이 죽임을 당한다. 아사헬이 죽자 그 형제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산꼭대기까지 추격한다. 복수심이 더 커진 것이었다. 이러한 요압에게 아브넬이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26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형제란 서로 이스라엘에 속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이 서로 적대시하고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울과 다윗이라는 왕이 주어지니 서로 갈라지고 대적을 하였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다윗을 이스라엘 속에 세우시니 자기 이익을 따라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이 죄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런 나눔도 없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 세상에 던져지니 언약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본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의로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잘나서 선택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의나 잘남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잘 살고 있었는데 더 잘 살라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합류시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으로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마귀의 머리를 치시는 엄청난 싸움을 스스로 홀로 이루어 내셨다. 그 은혜 덕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의 원칙대로 하자면 이스보셋이 정통이고 다윗은 정통이라고 할 수가 없는 상태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세상의 원리와 원칙에 의하면 이방인들과 같이 왕의 후손이 대대로 왕을 이어받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언약의 왕이란 결코 그런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약의 왕이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대결 정신, 즉 힘으로 왕의 자리를 얻고 힘으로 백성들을 통치한다는 사고방식을 제압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리는 왕이 언약의 왕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신 왕은 누구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