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28.사도행전 17:16-34 십자가와 철학

불편한 진리 2014. 9. 26. 17:53

28

십자가와 철학

사도행전 17:16-34


창세기 3장 이전에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1:31). 처음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대로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한 이후의 땅은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3:17).

성경은 창세기 3장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다른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3장 이전과 이후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하기 이전에는 사람이지만(2:15,19) 범죄 한 이후에는 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19).

때문에 창세기 3장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시면서 가능성으로 찬사를 보내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에 대하여 항상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서 4:14에 의하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결코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22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사야 40:6 이하에 보면,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고 급기야는 폐기처분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는 것이라고는 처음 창조하실 때에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었던 그 능력의 말씀, 그것 외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해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나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헛되다고 하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끝없이 자신을 위해 수고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간 지혜의 위대성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철학이란 바로 그러한 인간의 활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가 아덴에 이르게 됩니다. 아덴은 철학의 도시입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에비구레오(에피큐리안)란 완전한 즐거움을 추구하며 삶의 목적을 고통에서의 자유 함으로 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운명에 승복하고 상황에 적응하여 평안을 얻자는 사고방식입니다. 스도이고(스토아)라는 학파는 우주가 멀리 계신 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이성이라고 불리는 신과 같은 합리적인 과정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끝없이 진리를 찾고자 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하는 일에 대해서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누구든지 새로운 것을 말하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세상의 지혜를 사랑해서 연구한다는 말이지만 그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의 가능성과 이해력을 절대라고 믿는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땅에서 어떤 방법이나 재주를 사용하면 나중에 높은 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철학을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가능성에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과는 정면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또한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친히 사람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24,25).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30,31).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것과 전혀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모두가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경험되었던 것들이 성경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갖가지 전도 방법, 교인들을 다루는 방법, 교회를 키우는 방법, 아들을 낳는 비법,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방법 등등이 성경의 자리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로 교회 되게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천국가는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어 내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없이 신학을 시작한 사람은 결국 이 세상에서 멋진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덤벼들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사회보장제도, 구제사업, 이상적인 국가체제, 완전한 교회조직, 그런 것에다 성경을 인용하고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늘 우리에게 십자가만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 대해 사람들은 시큰둥했습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32)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아주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4)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 의하면 바울의 전도는 완전한 실패입니다. 도무지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환영할만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철학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은 누구나 다 신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철학적 욕심에서 제외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가 가는 길 역시 바울의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거부를 당하셨듯이 바울도 당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 신자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예배당으로 모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서로가 갈라서는 기준이 혈연이나 인간의 감정, 또는 환경이나 학연, 지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언약 백성과 비언약 백성이 갈라설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의 지혜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로 은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십자가를 무시하고 표적을 구하기도 하고 지혜도 스스로 찾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고전 1:22). 그러한 것들이 헛된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날마다 폭로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8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은 헛된 속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속임수 안에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이성에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성경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기본과제는 자신이 죽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철학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생명이 이 세상에는 없고 하나님만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나타내셨고 그 생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지옥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복음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애(humanity)의 요소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자들의 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십니다. 그러면서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어려운 역경을 헤쳐나간 일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인간승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도 아니고 인간승리도 아닙니다. 막연한 인간의 자존심일 뿐입니다. 그 자존심으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배격하고 심지어는 쫓아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어서 지옥에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철학적인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천국에서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 땅에 남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마저도 날마다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