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사도행전 17:1-15 성경
27강
성경
사도행전 17:1-15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특징 지워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예수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하는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정죄하셨습니다(요 7:7).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세상과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행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셨고 세상을 이기셨습니다(요 16:33).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 영원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보셨던 그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사셨던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희망이 있고 세상의 것에 대해서 많은 가치를 두면서 살고 있다면 아직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밖에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 문제를 자기의 어떤 개인적인 감정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특별한 체험이나 신기한 이적들에 대한 경험이 신앙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내게 예수를 믿도록 환상을 보여주셨다, 아니면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질병을 고쳐주셨다는 등의 개인적인 체험을 가지고 신앙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것처럼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마귀의 속임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막연히 성경만 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펼쳐서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의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거쳐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바울은 성경을 강론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가지고 설교했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기서 왜 갑자기 성경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인해 바나바와 다투어 갈라섰습니다. 그래서 실라와 함께 독자적으로 전도여행을 하게 됩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를 거쳐서 아시아로 가고자 했으나 성령이 허락하시지를 않았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더러 손짓하는 환상을 보았기에 마게도냐 쪽으로 가는 것이 성령께서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갔다가 귀신들려 점치는 여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로 말미암아 돈을 버는 자가 바울의 일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거기서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사명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데살로니가로 오게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이 가게 되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계속된 고난의 길을 과연 바울이 무엇 때문에 계속 가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바울의 일행에게 그것을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51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지 않자 먼지를 털면서 이방인에게로 간다고 했습니다. 18:6에도 보면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강론하는 것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강론하는 그것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알아듣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 앞에서 성경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말씀을 강론하니까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4절에 보니까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바울의 일행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성경을 대하기 전에는 같은 사람이었는데, 아니 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성경을 펼치니까 서로 다른 사람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한쪽은 말씀을 추종하고 한 쪽은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굳이 바울은 이방인으로 가지 않더라도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갈라놓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갈라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로부터 시기와 질투,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늘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일생은 그런 모습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좌절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성격이 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경을 강론하였는데 무엇을 강론하였습니까? 3절에 보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는 내용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전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한낱 인간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다가 십자가에 죽은 자로만 알고 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로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믿는 바를 증거 할 수밖에 없고 생애 전체의 유일한 내용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전했기 때문에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반대와 위협이 고난으로 끊임없이 밀려옴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아시아로 가지 못하게 하시고 마게도냐로 인도하시는 길은 바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이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과 같다는 것을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쳐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책에서 제시되고 있지 않은 사실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만 가짜 세상과 진짜 세상을 잘 구분해서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진짜 세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영생으로 소개하고 있고, 이 세상의 희망 없음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입니다. 그것만이 진짜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분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진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사적인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 그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내가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공부란, 우리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지금 이 자리에 다시 재현시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분의 피 흘림이 없으면 죄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사안임을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식의 복은 성경의 복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저급한 복을 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한정된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복이 진짜 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짜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 주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그분의 말씀을 추종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적인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식의 복이 내게 주어지지 않았더라도 예수님만으로 만족이 된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결국 성경공부는 내가 주님께 속하였는가 세상에 속하였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해석도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중심에서 내 기준으로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여주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신자요 성도입니다.
성경을 100독했다 200독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많이 그리고 열심히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많이 읽지 않는 것보다 많이 읽는 것이 백배 낫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문제이지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내가 믿는 바를 확인하고 그분을 말씀으로 따르는가 하는 점검이 자신을 향해 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다가 자기의 자존심이 짓밟혀지고 무시당해도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즐겁고 고마워지면 천당가고 있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다리십시오.
억지로 예수 믿는 척 하지 마시고 성령이 오셔서 나를 주장하시고 말씀으로 끌고 가실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경건의 폼을 있는 대로 다 잡는다고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주를 좇는 생색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속이고 주님을 속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요즘은 IMF 한파로 인해 더욱 고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만이 성도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종교를 가지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자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라만을 바라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악하게 보셨던 세상을 악하다고 성경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또 모일 때마다 말씀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주어질 수 있는 주님의 나라가 진짜 세상임을 성경에서 찾고 그대로 증거하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사는 성도인지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