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사도행전 11:15-26 그리스도인
18강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1:15-26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내용인데 요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자녀들에게 ‘설소대(혀밑과 아래 잇몸 사이를 연결시켜준 부위) 절개수술’을 많이 행하고 있다는 것이 보도되었습니다. 그 수술은 혀가 짧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술입니다. 그런데 멀쩡한 아이들에게 영어 발음을 좋게 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조기교육, 영재교육 등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열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대단하다 못해 너무 지나칠 정도입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우리 나라만한 데도 없다고 그럽니다. 못살았던 우리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대(代)에서는 못 배워서 남의 밑에서 고생하며 살았으니 다음 세대에게는 그 설움을 당하지 말게 하자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한(恨)을 자녀를 통해 풀어보자는 개인적인 욕심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자녀라고 하는 것도 나의 욕심을 이루는 대리 만족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에게 있어서 부모, 형제, 친척이라는 관계는 인간적인 핏줄을 이용해서 자기의 야망을 이루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그러한 부모들의 교육열을 부추기며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입시생들을 위해 기도회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현수막을 내걸고 우리 교회에는 이런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우리 교회로 와 달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대학에 넣어주고 취업난이 어려운 이때에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주는 하나님이라야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그런 것은 불교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자녀들만 대학가는 것이 아니라 절에서 불공드리는 자녀들도 대학에 갑니다. 그러니 교회나 절간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으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기독교의 모습인지 한국교회를 보면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고 현세의 복에 대해서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하는 것으로 목사들이 먼저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천국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중간단계가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면서 천국을 보여주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바르게 증거 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핏줄을 끊어버리는 자기 부정을 하도록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에 성령 받은 자만 남게 됩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유대 민족만 상대하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또한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을 주시되 표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제 적어도 베드로에게만큼은 분명해졌습니다. 주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뒤따라가서 증거 하는 증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것으로 비난하는 할례자들 앞에서 이 분명한 주님의 일하심을 베드로는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낱낱이 말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15절).
동일하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된 일이라면, 인간들이 구제하거나 기도한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 차원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신기하게 여깁니다. 이방인인 고넬료가 구제와 기도를 했다는 것이 신기한 게 아니라 지난 역사동안에 우리 이스라엘만 상대하시고 우리에게만 구원의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어찌 비언약 민족인 이방인에게까지 구원의 혜택을 주시는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그분이 주도하셨다는 것이 너무도 명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했습니다(18절). 생명 얻는 회개가 이방인에게도 나타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한 환난 때문에 신자들이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믿는 자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21절) 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26절).
주께서 성령 세례를 베푸셔서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진 자라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그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살아 계신 주님께서 순수하게 일하신 결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18절 말씀의 표현대로 생명 얻는 회개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 받은 특징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자기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27절 이하에 보면, 흉년이 들어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려고 헌금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9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두고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라고 표현하면서 그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같은 성령 세례를 받은 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얻는 회개를 받은 자, 곧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인간의 혈통에 의해서가 아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나눈 자가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6이하에서 이미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섰다고 말했을 때에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동생들인가? 라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에 동의하고 그 뜻대로 사는 자가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새로운 관계를 맺은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 얻는 회개를 받은 자입니다. 생명의 회개는 내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날마다 자기의 허물, 자기의 죄악 된 본성이 보이기 때문에 자기를 신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할 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했을 때에 얻을 수 있는 대가가 아닙니다.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가 결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장하시는 자는 회개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와 더불어 주님의 십자가만 보인다는 것은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란 내가 억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욕심과 자기 잘남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면 회개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이란 관계입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내 쪽에서 맺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묶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관계에 우리 쪽에서 무엇인가를 자꾸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예배, 기도, 헌금, 봉사, 전도 등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나의 예배, 나의 헌금, 나의 기도, 나의 전도, 나의 봉사를 믿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발산되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을 위하는 일인지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인지 늘 주님과의 관계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늘 주님의 일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위한다고 곧잘 말합니다.
내 쪽에서는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주님 편에서 보자면 그것이 주님을 모독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 안에서 늘 회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오늘 회개했다고 해서 내일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순간순간 죄를 범하기 때문에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주의 성령께서 십자가에 비추어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항상 십자가가 새롭게 보이는 회개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회개 때문에 오늘도 세상과 세상의 것을 부정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것들에는 항상 핏줄(혈통)과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늘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부인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