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16.출애굽기 16:1-36 만나와 메추라기

불편한 진리 2014. 9. 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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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6:1-36

만나와 메추라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를 지나 엘림에 이르렀다. 엘림에는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있었다(15:27).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휴식처였다. 그러나 16:1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라고 했다. 그들이 아무리 편안하게 쉴 수 있었던 곳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목적지는 엘림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안식의 장소를 뒤로 하면서 이렇게 좋은 곳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니 가나안 땅은 더 좋은 안식의 곳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광야로 들어가야만 했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는 이 땅에 있는 예배당 건물을 교인들의 안식처로 주려는 것 같다. 성전(?)건축을 강조하면서 있는 말 없는 말 꾸며가며 성전건축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교회들을 보면 참으로 사기치는 단수가 고단수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천국에서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에 있지 이 땅의 것에 있지 않다. 예배당 건축이 안 되면 어떤가? 그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위엣 것을 구할 수 있다면 그 모임이 교회요 그것이 주님의 몸인데···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예배당 건축에 사활을 걸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건너고 여호와를 찬양했던 이스라엘은 마라에서 뿐 아니라 신 광야에서도 애굽에서의 배부름과 편안함을 생각하면서 계속 원망하였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자신들의 기대와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애굽에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같이 놓고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보는 광야는 애굽의 연장에 불과했다. 아니 애굽보다 더욱 열악한 자리로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이 좋아지지 않는 한 늘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 믿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내 쪽에서 원하는 구원에 하나님이 맞추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나의 환경과 처지, 형편을 따진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세상적으로 결코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즉시 언제든지 훌훌 자리를 털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들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자 하신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해서(4) 애굽적 사고방식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왔지만 애굽에 대한 향수에 그대로 젖어 있다는 것은 현재 자신들의 존재 의미가 어린 양의 피에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들도 과거와 세상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욕심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모세에 대한 원망은 곧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8).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전 15:31).

이스라엘의 원망이 있자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셨다. 이스라엘은 아침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을 거두면서 이것이 무엇이냐?”(만나) 라고 했다. 만나란, 이스라엘이 한 번도 구경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즉 세상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더 이상 세상의 양식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에 없는 하늘의 양식을 바라보는 존재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땅에서 채워지는 것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세상적 사고방식이다. 이 사고방식으로 살자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원망, 불평뿐이다.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의 증거였다. 다시 말해서 만나에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33) 고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성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인간의 불신앙과 대비되어질 때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만나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후에 하나님은 신명기 8:3에서 이렇게 밝히신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가는 양식은 말씀이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지 떡(만나)이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면 살 수 있다는 것이지 무엇을 먹는가, 무엇을 입는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참고 마 6:31,32).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함에서 오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생존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 고민할 바가 아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죽었어야 하는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는 것은 자신들의 가치 여부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생존을 넘어서서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만나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챙겨야 했다. 먹고 나서 아침까지 남겨둘 수 없고, 안식일에도 거둘 수가 없었다. 하루분이든 이틀분이든 나의 준비성에 맞추어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하여 이 땅의 것으로 얼마만큼 준비해 두었느냐 하는 것에 행복이나 안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수 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12:20). 하늘의 것은 항상 완성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주어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자가 성령 받은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