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15.사도행전 9:20-31 그리스도의 공동체

불편한 진리 2014. 9. 20. 17:37

15

그리스도의 공동체

사도행전 9:20-31


우리는 바울 사도에 대하여 떨쳐버리지 못하는 생각은, 그는 위대한 사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까지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요, 신약 성경 중에서 13권이나 기록할 수 있었던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의 업적만 생각했지 실제로 그가 당한 고난, 그가 진정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바울 사도의 업적을 기록해 놓고 우리로 하여금 바울과 같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울과 같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핍박하는 못난 인간일지라도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말씀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사울을 굴복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바울과 같이 되자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울을 굴복시켜서 바울 되게 하시는 주님이 더 위대하고 그분이 더 크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분이 나타내신 복음만이 죄인들을 주님의 주님 되심 앞에 굴복하게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드러내신 복음 앞에 굴복된 적도 없고 항복하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늘 다른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말씀만으로는 목회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만 가지고서는 ()교회를 이룰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우리 교회가 원하는 웅장한 성전건축(?)이 무리 없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님을 향해 협박하고 있습니다.

있는 고질병이 해결되어야 말씀을 믿겠다고 합니다. 이번 승진에 자신이 누락되지 않아야 열심히 교회 나오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내 자녀의 앞길이 탄탄대로라는 것이 보장된다면 그때 가서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도무지 십자가 앞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온통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란 우리 자신이 살아남는 일에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적으로 망하게 하고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을 부르신 주님은 결코 사울을 이 땅에서 훌륭한 위인으로 만들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굴복된 한 죄인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울 역시 그의 남은 생애가 물질의 복을 받고 호의호식하는 생활이 아니었다는 것을 부르심을 받은 시작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9:15,16에서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주님이 사울을 무엇 때문에 택하셨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무엇으로 나타내시느냐 하면 주님을 위해 해를 받는 것으로, 즉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모습 그대로 십자가의 길,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가는 것만이 주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가 욕먹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사울은 이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믿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삶은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니까 어떤 사업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사울은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20). 자신에 대하여 오해하고 경계하는 일이 있어도 그 일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였습니다(22).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 앞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29).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누구나 다 목회자가 되어서 주의 일을 해야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만을 위해 살면서 예수님만을 전하는 목적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중심이나 목표가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결코 사울은 예수님을 전하면서도 교회를 위하여 크게 보탬이 되었다거나 유익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전부 도망 다닌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밤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니까 먼저 믿은 제자들이 그를 만나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통해 간신히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인사를 하고 예루살렘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예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울은 다시 자기 고향인 다소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은 이후의 사울의 삶이었습니다.

여기에 성경은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하여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갖가지 전도방법과 제자훈련이 실시된 때가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예배당이 완공된 때도 아니었습니다. 선교 센타가 건립되어 수많은 선교사가 준비된 때도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없애고자 했던 사울이 이제 겨우 말씀에 굴복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동시에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득세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즉 핍박할 자는 여전히 주님을 핍박하고 있고 주님의 부름을 받은 자, 예수를 믿는 자는 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그런 상태로 교회는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갈 수 있었습니까? 한 마디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3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주님만을 경외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위로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모을 수 있는 능력 있는(?) 목회자가 부임해 와야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자라 할지라도 포용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목회자가 와야 교회가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이 풍성해야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를 세우고 많은 직분자를 세울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 전하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갈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여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분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사울에게 핍박받으셨던 그 예수님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9:17)고 했습니다.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그분이 나를 너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사울이 만난 예수가 다른 예수가 아니라 같은 예수라는 뜻입니다. 사울에게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신 그 예수님이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늘 같은 예수를 말씀 안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서 목회자에 대하여 불만이 토해지지 않도록 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놓고 회개하는 모임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예수님만 자랑하고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몸만 남기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4:3-12)고 했습니다.

하나가 되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 주님의 십자가 안에 하나로 만드신 것을 아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고 그 몸을 세우는 일에 하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 내는 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자기 자랑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직 머리되신 한 분 그리스도 그분의 의만 공개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믿고 그분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기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새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만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지향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만을 전하고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지는 죽음을 보여준다면 그 동일하신 예수님 앞에 같이 굴복하고 주님만을 높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분만 존귀하게 여기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만 잘났느냐?’라고 질타합니다. 교회에서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같은 예수님, 같은 성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주님을 섬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직 성경대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는 다른 예수를 믿는 자들에 의해 소외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몸만 남기도록 세상 것을 날마다 제거하는 자들의 모임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요 교회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