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09.사도행전 5:1-11 교회의 순결

불편한 진리 2014. 9. 17.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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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순결

사도행전 5:1-11


일반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 걸림돌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를 개입시켜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본문을 대할 때에 교회와 연관시켜서 해석할 때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로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교회라고 간판을 걸고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집단을 가지고 교회로 전제하고 성경 해석에 연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성경과는 동떨어진 모습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이지 교회를 보여 주는 책이 아닙니다(5:39).

오늘 본문은 대표적으로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교회의 관념을 가지고 해석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도 교회 당회장 목사의 권위의식을 높이는 데나 혹은 목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누구든지 패가망신하거나 죽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엄포 놓고 공갈, 협박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본문 말씀 때문에 앞으로 헌금을 잘해야 하겠구나!’ 또는 교회에서는 함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구나!’라고 생각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헌금은 반드시 목사의 발 앞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십일조는 반드시 일원짜리 하나라도 떼어먹지 말고 철저히 해야 하며, 본 교회에 내야지 다른 교회에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근거로 이 본문을 사용하는 설교자의 설교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돈의 얼마를 감춘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4장에서 사도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에 의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더욱 교회는 말씀대로 든든히 서 갈 수 있었습니다. 32절 이하에서는 교회가 유무상통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4:37)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과 나눌 때에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도들에게 맡겨서 말씀대로 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권위자입니다. 권위란,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주어서 사도들이 그것으로 교회에 핍절한 사람을 위해서 쓰게 되니까 온 교회가 힘을 얻고 생동을 얻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나바의 물질적인 도움으로 인해 교회가 힘을 얻고 위로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4:33에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이미 부활하신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란 단순히 순간적인 뜨거운 감정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된 그 상태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4:32에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말씀에 복종하면서 사는 모습이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 받은 모습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알기 쉽게 유무상통하는 모습으로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니까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오해한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요셉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재산을 팔아서 사도에게 갖다 바치니까 사람들에게 칭송도 받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습을 자랑하게 된다는 식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결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의 얼마를 떼어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도 아닌데 주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과 주님의 은혜성을 모독하는 죄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주님이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마귀적 속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철저히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에 대하여 간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간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이 쉽게 생각하고 자기 자랑과 칭송을 위해 더럽혀 놓을 가능성은 불을 보듯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차례로 치셨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11)고 했습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유대교의 기득권으로 사도들을 괴롭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부활한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대하여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그런 무능한 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차제에 주님은 교회를 우습게 알고 주님을 속이며 무시하려고 했던 자들을 치셨습니다. 적어도 이 일을 통해서 얼마간은 주님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도들과 신실한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자기 몸 된 교회를 친히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순수함은 인간이 거론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직 주님이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교회로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알도록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움직이실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과 만나게 되고 주님이 살아 계심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홀로 머리가 되십니다. 목사나 장로, 권사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교회라면 그것은 이미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친목단체에 불과하고 한낱 계모임이나 종교단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인정하는 자들만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는 교인을 인간이 함부로 막아서도 안 되고 쫓아내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우리가 막을 수도 없고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십자가만 선포함으로 십자가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자연히 떨어져 나가도록 오직 복음만 선포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순결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는 고개 숙이고 겸손하게 와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세로 나와야 합니다. 내 자랑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자랑을 담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주님의 은혜를 보답한다는 말을 잘합니다. 우리가 어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털끝만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에 올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오게 하셨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 대한 보답입니다. 교회를 키우는 인간적인 방법과 도구들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다스림에 복종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성교회로 모이면서 처음부터 온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힘으로 예배당을 제공하려고 우리 교회에 나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힘으로 운영되어지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물질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교회로 와서 무엇인가 제공하려고 하는 것을 날마다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이 자신을 따르고자 할 때에 반갑게 맞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재물을 이용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졌던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돈으로 만들어지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께서 죄인들을 감동시키시고 부르셔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참으로 염려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될까 라고 염려를 하십니다. 이렇게 발전하는 시대에 한 사람이라도 더 불러 모아야 예배당이라도 짓고 사람들의 힘을 모아야 위로도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개척 양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가 건물이 있어야 되고 예배를 드리는데 필요한 기물들이 있어야 된다고 전통적인 사고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도 개척을 계획하면 상가 건물을 얻으러 다니고 예배당에 채울 물건부터 확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교인이 모이면 어김없이 예배당 건물을 짓기 위해 건축 헌금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가에 세 들어 있는 교회는 예배당 건물을 짓기 위해서, 건물이 있는 교회는 더 크게 짓거나, 교육관을 건축하며, 기도원을 사들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란 건물이 있고 예배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당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꼭 부동산을 확보하고 거기에 예배당을 세워야만 주님께 영광이 됩니까? 아닙니다. 예배 처소가 전세로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예수님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다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건물을 확보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순수하게 자신의 몸으로 인정하는 모임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해야 교회답게 되지 않겠느냐 하는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 자신이 친히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들이 득세하는 어제의 교회를 부수고 오늘 주님의 교회로 새롭게 세워 가시는 주님의 뜻에 날마다 순종하는 교회가 참된 주님의 교회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