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사도행전 4:1-22 예수의 이름과 권세
8강
예수의 이름과 권세
사도행전 4:1-22
우리가 사도행전을 대할 때에 막연하게 어떤 큰 권능과 이적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진행되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베드로의 강론,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는 사건,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사도들이 천사의 직접적인 인도로 감옥을 탈출하는 일,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에 일어나는 놀라운 능력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로 사도행전, 또한 기독교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큰 능력이나 놀라운 일들이 사도행전 전체를 주도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일들이 우리 성도들 각자의 생애 속에서도 그대로 연속될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속에 일어난 일들이 큰 권능과 이적들의 연속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상조차도 힘든 고난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겪었던 고난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 맞으며, 여러 번 죽을뻔 하였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했으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강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 동족으로부터, 이방인으로부터, 때로는 이단들로부터 무수한 위험을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의 고난들을 어찌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대충 말한 것들입니다. 대충 말한 것이 이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다면 무조건 이생과 내세에서 동시에 편안하게 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우리의 눈을 넓혀 성경을 대한다면 그 속에는 놀라운 또 하나의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속에서 한 본문, 한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큰 권능과 이적 때문에 영광과 찬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적과 큰 권능으로 나타나고 내게 큰 복으로, 유익으로 베풀어지는 것만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넌센스입니다. 성경에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2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부활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 그들이 싫어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로 새로운 예수의 나라를 만들어 지금도 살아서 계속 그 나라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성전의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이미 베드로와 요한은 선포하였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만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싫어하였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유대인들의 세계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의 부활을 싫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 어쩌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자기들의 권능으로 일으켰다고 했으면 이런 고난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이적이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절).
사도들은 거기에 덧붙여 인간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말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절). 이 말은 한마디로 하자면 너희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칭 건축자라는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집을 세우는 건축자와 같이 율법으로 인간의 공로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찮게 여기고 버렸던 예수님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죄인들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루어내지 못하는 의를 하나님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셨다고 사도들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12절)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십자가로 모든 의를 이루신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 그분이 지상에 오셔서 언약을 친히 성취하신 이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건축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이루신 십자가 그것만이 우리의 의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지금 유대 지도자들 앞에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이 된다고···
결국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놓으라고 촉구하고, 유혹하며 날마다 회유하고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다른 것은 다 놓을지라도 예수의 이름만큼은 놓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모든 것을 걸어 놓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권세에 도무지 굴복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 안에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예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애써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일 수박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때문에 사도들을 붙잡아서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이 바로 마귀적인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는 그들의 생각과 행위가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당하지 않고서는 그 이름의 고귀함, 그 십자가의 숭고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권세와 이름에 굴복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이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바로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 교회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늘상 하나님의 편이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고 성령님을 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경계하고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또는 큰 능력으로 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적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신 아들로 인해 하나님 앞에 굴복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으로 하나님께 굴복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느 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은 것입니다(19절).
마가복음 13:11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결국 사도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담대했기 때문에 서슬 퍼런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하게 하신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31절에 보면,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큰 이적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해롭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골탕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사도들의 능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신자들의 능력도 바로 이러한 능력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에 굴복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 삶, 어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놓지 않는 능력 그것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행 26:19). 바울 사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는 믿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싫어합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들의 구호도 이러합니다. ‘교회는 다니되 예수는 믿지 말라!’입니다. 교인이 되는 것은 괜찮지만 혹시 만약에라도 예수님의 사람이 된다면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은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있습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7). 그러기에 예수의 권세와 이름을 믿는 자는 하늘에서 보이신 것들로 인해 하늘의 것들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고 고백하였던 사도들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증인노릇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못난 우리를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에 굴복시키신 성령님의 능력에 오늘도 순종하면서 살기로 합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