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출애굽기 5:1-23 출애굽을 요구하는 모세
5강
출애굽기 5:1-23
출애굽을 요구하는 모세
1. 출애굽기 5:1-14
모세와 아론은 함께 바로 왕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선포하였다. 모세가 말한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절), 또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3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절기”나 “희생”이라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정해 주실 희생제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유월절로 인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됨의 의미이다. 구원이란 단순히 내가 천국간다는 차원으로 내 중심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상태로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나 바로 왕은 인간을 노동 생산성의 효용 가치에 두고 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으로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가 아니면 바로의 관점에서 보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바로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예컨대, 새 신자가 들어오면 우리 교회 일꾼이 될 만한가로 따진다. 교회 일꾼이 많으면 힘 있는 교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 교회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은혜를 힘으로 삼는 교회이다.
본문에서는 이 두 사상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에”(1절)라고 나타내는 반면 애굽의 간역자들은 “바로의 말씀에”(10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과 바로의 말을 따르는 두 패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다. 그 둘은 본능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바로의 말을 따른다는 것은 오늘날 세상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만들고 인간의 말을 더 신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법, 교회의 전통적인 관습, 우리가 만든 신앙고백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되어야 한다.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2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여호와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애굽이라는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데 여호와라는 신에 의해 방해받기 때문이었다.
바로가 무시하는 여호와 그분이 예수님으로 이 땅을 방문하셨다. 사람들은 누구도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사 53:3) 자기 백성들조차도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급기야는 그분을 십자가에 죽이고 말았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인간들의 대접이었다.
자신의 발전과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예수는 좋은데 만약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다른 신으로 대치해 버리는 것이 죄인들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를 크게 하고 사람을 모으고 큰 사업을 하는 일에 아무래도 방해되는 분이 십자가의 예수님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사람을 많이 모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함께 죽자고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세상적인 복을 주는 예수님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가짜 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이라는 말은 할지 모르나 복음의 내용은 숨긴다. ‘십자가’라는 말은 할지라도 십자가의 의미는 왜곡한다. 이러한 행위들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애굽인과 같은 자들이며 마귀의 하수인이다.
결국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사람이란 어떤 자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임한 자는 말씀만으로 만족하는 자이다. 따라서 참된 신자란 말씀이 이끌고 가는 곳으로 갈 뿐이다. 설령 그곳이 망하는 자리가 되더라도 말이다.
2. 출애굽기 5:15-21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노동을 극대화시킴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학대를 선언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바로는 벽돌에 넣는 짚을 주지 않으면서 전과 같은 분량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였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은 더욱 심한 고통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 모세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는데 과연 바로의 노림수는 무엇이었을까?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만났을 때에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라고 원망한다. 결국 바로가 원했던 것은, 모세와 아론이 같은 동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배반당해 스스로 낙심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여호와라는 신보다도 위대한 바로 왕의 이미지를 조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이미 “바로의 종”(15절)으로 “바로 왕의 백성”(16절)으로 자신을 굴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언약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증명된다.
여기서 왜 이스라엘에게 고난은 그쳐지지 않고 더욱 심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답변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중되는 고난을 통해 그들의 죄된 애굽적 심성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애굽을 떠날 마음이 없었으며, 도리어 애굽을 더 좋아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부끄러움과 아픔들을 철저히 공개하기를 원하시고 또한 그렇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현실을 넘어서 장차 주실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롬 8:18). 우리는 자신의 자존심이 있는 한 절대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 인간의 자존심이 철저히 짓밟힌 자리에서 주님은 보이게 되어 있다.
교회란 서로 폼 잡고 경건의 자랑을 하기 위해 모이는 의인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모임이기에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요모양요꼴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이렇게 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자랑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렘 9:24). 그러므로 교인들은 목사에게, 목사는 교인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란 도리어 자신의 허물을 통해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에 불과하다.
3. 출애굽기 5:22-23
모세는 바로 왕으로부터 단호한 거절과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로부터 소외와 심한 모욕을 당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기에 예상된 일들이었다(3:13,19; 4: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 문제로 인해 하나님께 다시 간구하게 된다.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22절)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자기 백성들이 학대를 당하지 않고 속히 구출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이 좀더 하나님다운 모습이 아닐까? 모세의 항변은 “주의 이름으로”(23절) 말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도리어 더 많은 학대를 당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원하는 구원은 항상 따로 있기 마련이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구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요구한다. 자기가 원하는 구원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이란, 영생의 차원이 아니라 이 땅을 계속 유지시키면서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구원이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사고방식이 하늘의 사람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이 땅에 내려오기 위해서라면 이 땅의 것은 모두 다 불타 없어져야 한다. 그 아들에 대한 복수의 차원에서 하나님은 이 땅을 멸하실 것이다(계 1:7).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구원과 다른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면, 신앙생활이란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면서 말씀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 속에 담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