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04.사도행전 2:1-4 성령강림(1)

불편한 진리 2014. 9. 1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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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1)

사도행전 2:1-4


오늘날 교회는 신앙을 너무도 인간 중심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주관적인 신앙에 젖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은 본래 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인데 교회가 그것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돈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돈의 지배를 받는 체제로 바뀌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돈이 능력이지 말씀이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한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능력이 상실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돈을 모아서 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인수가 많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은 돈을 들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회자들은 저마다 목회성공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많이 모았는가에 비례하여 얼마나 많은 사례를 받으며 부를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돈의 힘을 축척하는 일이 된다면 어떤 신학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도 마음대로 이용하고, 성경도 제 멋대로 왜곡해도 무방하다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오순절 신학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차츰 오순절 신학을 신앙생활 속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앙의 권태감과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여 구원의 확신도 있는둥없는둥 신앙생활하고 있었는데 신비함과 열정적인 것 내지는 종교적 경험들로 말미암아 무엇인가 내 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내게 이런 뜨거움(?)이 있는 것 보니까 아이제야 정말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구나라고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신앙생활 할 맛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오늘날 장로교조차도 간판은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한오순절교 장로회아니면 대한순복음교 장로회라는 이상하고 웃지 못 할 부류의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는 모두다 인간을 중심으로 한 주관적인 신앙으로 정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이란 객관적인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근거가 내 쪽에 있느냐 주님 쪽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경이냐? 아니면 우리의 체험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은 모두가 성경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또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 많은 교인들이 성경보다 체험을 앞세우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성경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체험 위주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의미를 강론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즉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을 높이신 것에 대한 결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사건 때문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4:29-30에 의하면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니이다 주의 영을 보내사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영(성령님)이 보내어질 때에 죄인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는 메시야란,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이루시는 분이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 주()의 자리에 등극하신 것이었습니다. 주의 자리에 등극하신 그분이 그의 영을 보내실 때에 이 땅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자신의 권세로 성령님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로 임했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주관적으로, 임의로 하시는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했다는 것은, 불심판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임의로 주관적인 사역에 의해 되는 일임을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즉 예수님 자신이 하늘로 가야만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18이하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십자가 사역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부활, 승천, 상령강림으로 한 묶음이 되고, 이 사건들이 연결되어 나타내어진 자만이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자들을 건져낼 수 있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성령강림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한 마디로 말해서 온 천지를 향해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 사건을 계속적으로 재현시켜 심판과 구원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주님의 운명과 같은 자들을 성령께서 주장하시어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시는 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 오순절 때의 성령강림 사건 자체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오신 성령께서 그 주님의 운명과 같이 자기 백성들을 고난의 길로 몰고 가시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주님의 나라를 담아내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구원사역을 완성하셨기에 세상 끝 날까지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다스리시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된 우리는 성령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 라는 식으로 주관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오심이 왜 있어야만 되었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객관적인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인간은 전혀 주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이 불가능했기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인간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기에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사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스스로 할 수 없었고 하늘에서 오신 분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실 때에 믿을 수 있는 존재임을 우리는 날마다 다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신자들을 능력 있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되었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란 특별한 능력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 그것을 가지고 가르치시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14:26). 성령님의 활동은 오직 주님을 증거 하는 일에 초점이 모아집니다(15:26).

따라서 십자가를 증거하고 자랑하는 모습이 성령세례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그의 십자가를 드러내시는 역할이 바로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아직도 주님 앞에 자기 자신의 신앙에 어떤 부분이든지 내세울 것이 있고 자랑할 것이 있다면 성령님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삶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성령님에 의해 주장되어지는 삶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릴 줄 아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아직도 내가 예수 믿으려고 하는 자라면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주님의 약속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믿게 된 자로 고백하고 그분의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으로 사는 자가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내가 하는 일에 성령님께서 들러리로 서 주시기를 간구하고 나를 도와주는 것이 성령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이제는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