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히브리서 11:32-40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
히브리서 46강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
히브리서 11:32-40
길을 가다가 내가 아는 사람의 차와 똑 같은 차가 지나가면 차량번호를 확인하게 됩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습니다. 알아도 별 수 없고 몰라도 별 수 없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의 차량이면 반가워서 표시를 하게 됩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람마다 다 그런 것 같습니다.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옆에 자동차가 지나가도 그냥 무심하게 보는 차와 그렇지 않은 차가 있습니다.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차가 지나가면 관심 있게 보게 됩니다.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어려움을 당하면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라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학교의 선후배라는 관계 때문에 모른 척 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 이런 것들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이란 이렇게 끝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세상의 이러한 관계는 질서를 유지하는 차원에서만 제대로 된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연장자와 연소자, 부모와 자식 이 모든 관계들은 사랑의 관계라기보다는 세상에 먼저 온 시간적 순서에 의한 관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결코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는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랑은 한정적이고 부분적이며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관계가 아닙니다. 단순한 관계를 넘어선 관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기초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들어 있는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 던지신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고 또한 계속적으로 그 사랑에 의해서 관계가 유지되어 가는 것이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법이 기초가 되어 있지는 않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율법이 기초가 되어 있고 율법에 의해 주님과의 관계가 유지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법이란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따라서 보상과 벌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속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는 봉사하는 것에 대하여 상급이 주어진다고 주장하고 또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벌에 처하게 된다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법이 없고 모든 것이 다 자유롭다고 한다면 누가 무엇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도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말씀도 또 하나의 율법으로 받아들입니다. 신약에서 명령법으로 주어진 모든 말씀들이 성도를 향하여 주신 신약의 새로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법이 되어 우리를 옭아매고 있기 때문에 헌금하고 주일지키며 십일조하며 예배드리고 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 성도와의 관계는 결코 법의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입니다. 완전한 사랑에 의해 주님께 붙잡힌바 된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내신 하늘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는 그 사랑에 이끌려 주님의 뜻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법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찬송을 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며,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버리며 기도하며,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것은 없고 주님만 존재하시기 때문에 물질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은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반대말이 원수를 삼는 것이나 혹은 미워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인지도 모릅니다. 서로가 미워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상대가 뭘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그것조차도 버릴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참된 성자가 되겠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모든 종교가 다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버려서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탈하자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세상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수행을 통해 해탈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통한 인격도야도 아닙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때문에 나를 버리게 되고 나를 버린 결과로 오는 고난들을 무수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 중에 마지막 부분인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소생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자는 이 땅에서의 소생이 아니라 악형을 받고 죽어간 자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더 나으냐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에 다시 살려줌을 받는 것이 훨씬 좋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도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잘 살아 보려고 합니다. 교회를 통해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헌금해서 물질이 풍성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예수는 버리고 기도원이라는 것을 통해 병 고침 받는 것이 우선이 되어 거기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마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런 차원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부활은 소생이요 환생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이란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이요 몰입입니다. 새로운 세계, 즉 죽음이 없는 영생의 상태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세계에 새로운 세계를 가져온 엄청난 사건입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영생의 세계를 오게 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이란 죽음에 대하여 초월되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죽어도 괜찮고 살아 있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죽는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믿어지고 받아들여져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런 관점에서 36절 이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을 받기도 하였지만 어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악형을 받고 고난을 받으며 죽임을 당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과 죽음을 구차히 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구약의 증거들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여기서 구약 시대에 성도들이 믿음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당해야 했던 고난과 죽음의 대한 모든 사례들을 다 밝히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들을 제시함으로 다양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함으로 오직 약속만을 바라보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고난과 죽음 속에서도 오직 약속만을 바라보고 살았듯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 36,37절에 보면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주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족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도 누가 이러한 고난을 받았는가 하여 애써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은 여러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 성취란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당한 여러 가지 고난들, 즉 칼에 죽는 것, 양과 염소의 가죽 외에 변변한 의복을 걸칠 수 없었던 일,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은 일,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한 일 등은 일일이 다 예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개인들과 공동체가 대대에 걸쳐서 경험했던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경험하고 있는 고난들입니다.
본문의 어법은 믿음의 사람들이 달게 감수하고자 했던 야만적 모멸과 극심한 간고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순간만이라도 진리를 부인했더라면 방면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고난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 본문은 불신 세계의 불같은 증오감이 진리를 어떻게 대적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신뢰하는 자들을 어떻게 인정 사정 없이 사냥하고 습격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0:7,8에 의하면 예레미야의 심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그 외에도 많은 고난들을 당했습니다.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두목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가로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예레미야가 가로되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방백들에게로 끌어가매 방백들이 노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으로 옥을 삼았음이더라”(렘 37:13-15).
이런 기록들은 구약 성경 전체에 산재되어 있습니다. 특히 선지자들이 많은 고난들을 당한 것을 선지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 같은 경우는 가시와 찔레와 전갈 속에 있는 것 같을 것이라고 했고(겔 2:6), 4:4-8에서는 390일 동안 모로 누워 잠을 자야 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가 죽어도 울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지내야 했었습니다(겔 24:15-24).
구약의 성도들이 이런 식으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9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믿음으로 그들이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뭔가 흔들릴 수 없는 증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증거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죽음에 이르는 현장에서조차도 약속의 궁극적 성취자가 되시는 메시야를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 이처럼 희생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38절)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믿음의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또한 세상이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에 이런 대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세상은 우리를 멸망의 자리로 인도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영생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영생의 자리로 인도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를 사로잡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영생의 자리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39, 40절에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 장에서 그 이름이 거론되거나 혹은 거론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수많은 세월에 걸쳐서 고난과 핍박 속에서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극렬한 시련과 핍박 앞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시련과 핍박들을 극복하도록 함으로써 약속으로 오실 분에 대한 증거를 더욱 확고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약속의 성취를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믿음의 눈으로 약속을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멀리서나마 기뻐하면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에 이끌려 살고 또한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13에서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신 것을 받아들였기에 세상에서 오는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좇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세상이 우리를 용납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믿음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늘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러기에 십자가를 믿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믿어졌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의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온 결과입니다. 믿음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그 믿음과 사랑의 힘으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거부하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