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히브리서 11:30-31 믿음으로 라합은
히브리서 44강
믿음으로 라합은
히브리서 11:30-31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에서는 믿음과 순종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란 구원받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고 그 믿음을 가지고 순종을 얼마만큼 하느냐에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달라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은 있는 것 같은데 믿음에 의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키워주기 위하여 각종 이벤트를 동원합니다. 윤리실천운동이라도 해서 믿음의 역동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과는 다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이라면 애초부터 잘못된 믿음입니다. 말씀에 따른 순종이란 누가 하라고 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반드시 말씀을 좇아 사는 순종이 있기 마련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제 라합이라는 인물에 대하여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5)라고 라합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라합의 믿음, 순종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며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30절에서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두루 다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누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본문은 바로 앞에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30절에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두루 다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는 사실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결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러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복종하는 맹종으로 홍해를 건넌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완전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환상적인 상황에 이끌리어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건널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에서 벌이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피 때문에 장자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해 살려주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수반된 약속이 이스라엘을 살린 것입니다.
약속이 있었기에 홍해 앞에서도 주저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유월절 피가 뿌려진 하나님의 백성들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도록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홍해가로 내 몰았고 또한 홍해를 건너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쩔 수 없이 건너게 된 것입니다. 뒤에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기 위하여 오고 있었고 홍해는 가로놓여 있는 상황에서 바다가 갈라지게 되니 자연스럽게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으로 이끌고 계셨고 그 약속을 좇아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광야 생활도 거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가나안 땅의 앞에서 약속을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가는 가나안 땅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현수막을 내걸고 이스라엘을 환영하고 있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이미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야 하고 그들을 내쫓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과 처음 맞닥뜨리게 된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일은 무기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고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하도록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 기도회를 한다든지 금식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거대한 여리고 성 주위를 일정한 규정에 따라 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6:2-5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불면서 언약궤를 앞세워 엿새 동안은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일곱째 되는 날은 일곱 바퀴를 돌되 진행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입 밖에 말을 내어서는 안 되었습니다(수 6:10). 그리고 일곱째 날 마지막 일곱 바퀴째에 양각나팔이 길게 울려 퍼지는 것을 신호로 삼아 모든 백성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여리고 성은 무너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탈취할 수 있었습니다(수 6:20,21).
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 아주 이상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하자 여리고 성이 실제로 무너졌고 그 성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느냐고 묻는다면 누가 무너뜨렸다고 말해야 옳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합작입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신 결과입니다.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칠일 째에는 일곱 바퀴 돌았고, 제사장이 일곱 양각나팔을 불었고 언약궤를 앞세웠습니다. 이 모든 소품들과 행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의미의 수로 상징되는 숫자입니다. 언약궤가 앞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무리의 앞서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여리고 성의 정복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신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여리고를 돌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녔기에 성이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있다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말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식의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의미의 믿음으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돌았던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다는 것 자체가 믿음으로 한 것과 동일한 차원으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믿음으로 건넜다고 하는 말이 백성들의 자의적인 믿음이 아니듯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 역시 이스라엘의 자의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믿음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이끌림을 받고 약속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끌림 받는 모습 그것은 신약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로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본문 3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여리고 성의 함락에 대한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여기에 라합이라는 한 여자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3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라합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30절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의미를 순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생 라합은 순종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어떤 의미로 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에 살았던 라합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경험했던 일들과 광야에서 겪었던 일들 모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이 어떤 사실을 경험했던 것으로 들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으로 듣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라합의 고백 속에 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9-11).
라합이 들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을 건너기 전에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진멸하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상천하지의 하나님이란 온 천지에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것을 정탐꾼을 영접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 2:12,13). 그러자 정탐꾼이 대답하기를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수 2:14).
라합은 이방인이요 기생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에서 이스라엘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에 참여되었고 피뿌림의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되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라합을 두심으로 믿음으로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실제로 라합은 아무 것도 순종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탐꾼을 잘 대접한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믿음을 보여준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라합이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라합을 사로잡고 계셨기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의 믿음으로 순종한 모습과 여리고 성의 멸망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란 결코 공허한 감상이 아닙니다. 생각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은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도 은혜라는 식으로 합리화시켜서는 곤란합니다.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고 그분이 우리를 이끌고 계시다면 우리는 그분만을 바라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이어야 하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지는 능력입니다.
광야의 경험이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이적들을 수없이 체험했던 곳이 광야였습니다. 광야의 체험이 축적되었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체험이란 인간의 화려한 경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체험과 경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우리의 생각을 좇아 살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 죄인입니다. 과거에 해결했던 방법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먹혀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초월해서 일하십니다. 가나안 땅에 어찌 라합이라는 믿음의 사람이 존재할 줄 알았습니까? 이스라엘은 라합을 통해 참으로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경험은 가는 곳에서 마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의 경험이 하나님을 좇아갈 수 있는 요소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고 죄인으로 취급하는 기생 라합을 들어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1:31,32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라 자칭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이만큼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해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들이 죄인이라고 치부하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교리만 있었습니다. 가식된 삶의 껍질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에게 임하여 말씀을 좇아 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의 수많은 경험들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의 신앙의 가장 분명한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가장 분명한 요소는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과 생각을 초월해서 일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전히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자를 어떻게 굴복시키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늘 부족하고 도무지 생명과는 상관없는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 안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마음에는 십자가의 은혜가 거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