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38.히브리서 11:11-12 믿음으로 사라도

불편한 진리 2014. 9. 15. 16:41

히브리서 38

믿음으로 사라도

히브리서 11:11-12


내일(25)은 성탄절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성탄절입니다. 연말연시와 맞물려서 사회적으로도 기강이 상당히 많이 해이해지는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교회에서는 성탄절이라는 것이 있고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자각하며 신앙의 열심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성탄절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절기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 계획하고 결심했던 신앙의 모습들이 흐트러지고 문란해지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절기가 있다는 것에서 성탄절은 빠뜨릴 수 없는 절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탄은 있어도 성탄절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신 사건은 있었지만 성탄절이라는 절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죄인들의 땅을 방문하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속의 절정입니다. 그러기에 성탄, 즉 거룩하신 분의 탄생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로 지켜야 한다는 절기는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절기로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형태는 이미 구약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성탄절이 없다고 말해도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신앙이라는 문제를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열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날마다 밍숭맹숭한 상태로 있다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열심을 불러일으키고 불을 당길 수 있는 휘발유 같은 자극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자극제가 절기요, 이벤트이며, 교회에서 벌이는 종교적 의식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흔히 말하는 것처럼 기도원에 가서 불을 한 번씩 받아야 된다든지 절기나, 어떤 외부적인 자극을 통해 신앙의 열심을 회복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날마다 주님의 오심과 그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니 날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스스로 자기 육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사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지 자신의 믿음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가 가지는 의문은 과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사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오늘날 흔히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는 그토록 수없이 말하면서 왜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아마 실제로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에서 사라의 믿음 있는 역할에 대한 기록들을 많이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의 믿음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만큼 우리는 사라의 믿음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본문에 보면 사라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록 역시 창세기의 기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창세기를 잘 살펴보면 결코 사라의 믿음에 대하여 전혀 등한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사라의 믿음도 사라가 가진 독자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11절 서두에서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이끌었던 믿음이 사라도 이끌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관계된 측면에서 사라의 믿음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창세기 12:1-1-3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기 위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와서도 점점 남방으로 내려가다가 기근을 만나게 되니 애굽으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땅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애굽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소문을 들었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혼내시는 자는 바로였습니다.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가지고 창세기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한번 봅시다. 창세기 12:17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는데 사래의 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라 때문에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사라를 보호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왜 사라가 보호되어야 합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보면 단순히 아브라함 한 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땅에 대한 약속뿐만 아니라 후손에 대한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3장에서는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3:15,16)고 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땅을 주시고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않았다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에셀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시려고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5:2,3). 그랬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15: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후손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가지고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사라도 그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인줄 알았습니다(16:2,3).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고 한참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17: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라의 몸을 통해서 후손이 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열국의 어미가 된다는 뜻으로 사라라고 이름을 바꾸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주셨다는 것은 사라가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을 주신 분이 그 이름대로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사라가 되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상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후손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비웃었습니다(17:17, 18:12). 하나님의 능력으로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결단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삭의 출생을 통해 앞으로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주어질 것인가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즉 인간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고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은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일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그분이 십자가를 지는 일에조차도 제자들은 도망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무 도움 없이 홀로 이루신 독자적인 구속 사역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능력을 조롱하며 업신여기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라의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일하시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히브리서 기록자가 사라가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후손에 대한 약속이 믿어지도록 이끄셨기 때문에 사라가 아브라함의 약속 안에서 메시야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 언약은 단순히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언약이 아니라 사라를 포함하는 아브라함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사라를 통해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11)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는데 그 아내 사라가 있었다는 부부관계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는 사라 역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라도 이끄셨다는 뜻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베푸신 은혜(믿음)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인 아브라함을 통해 후손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꼭 있어야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상태로 은혜를 주시고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하나님 자신이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을 이루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 사라의 믿음이 대단했다고 볼 것이 아니라 사라까지도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어떻게 이끄시고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이삭이라는 후손을 주시는 전능을 보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탄절이라고 해서 우리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절기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항상 성탄(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