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32.히브리서 10:35-39 오실 이

불편한 진리 2014. 9. 13. 20:28

히브리서 32

오실 이

히브리서 10:35-39


지난 주일에 우리가 35절까지 살펴보았지만 오늘 다시 35절에서 연결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는 말씀에서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것은 용기를 가지고 어떤 일이든지 밀어붙이라는 식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담대함이란 결코 세상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겁 없이 달려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벌여 놓으면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라는 요즘 소위 말하는 배째라정신이 아닙니다. 돈 한 푼도 없으면서 거대한 예배당 건축을 무리하게 계획해 놓고 믿음으로 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막가는 정신도 아닙니다. 아무리 심한 중병이라도 약과 의료 기술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기도로만 병을 고쳐야 한다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의한 담대함이 아니라 자기 최면에서 나온 만용에 불과할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10:19에서 말씀했던 것을 근거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즉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기 때문에 성도는 담대함을 버리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는 담대한 마음,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담대함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그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약의 피 때문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게 되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담대함이란 우리의 용기나 자신이 억지로 만들어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그 믿음에 의해 성도에게 주어진 이 담대함이 하늘 성소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32절에서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고난을 잘 참아내었던 과거 자신의 신앙을 회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과연 우리들의 신앙의 근거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것을 다시 되새겨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로 하여금 고난의 큰 싸움에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오늘 본문 3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성도에게 있어서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본문의 문맥을 살펴온 입장에서 보자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인내란 결코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인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신 결과로 나온 인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참는다고 해서 참을 수 있습니까? 특히 여기서 이렇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을 받는다는 것은 온갖 환난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피에 의해 하늘 성소에 나아가게 되었을 때에 받을 기쁨과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영생을 약속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로부터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보여주신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인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관심을 두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는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즉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영생의 자리에 두시는 것까지가 약속의 성취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논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게 되는 그것이 약속 성취의 궁극적인 면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하늘나라에까지 가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최종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난은 과정일 뿐입니다. 성도란 궁극적으로 하늘의 영생에 이르게 되는 데까지입니다. 그것이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영생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신 주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궁극적인 영생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로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고 또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내가 아니면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고 하늘 성소를 향해서만 나아가도록 주신 믿음이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한 요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심에서 있어서 인내하신 그것이 곧 믿음의 한 모습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가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1-23).

결국 이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을 실현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에 대한 최후의 기쁨은 반드시 약속을 가지고 일하신 하나님에 의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단지 인내가 필요할 뿐입니다. 필요한 것을 활용하는 입장 그것이 우리가 구원 얻는데 있어서 공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보자면 언약의 피로 하늘 성소에 나가게 된 이 담대함,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버릴 자격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담대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록자는 다시 우리의 관심을 주님께로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셨던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7,38).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잠깐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26:20,21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가져온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사야 26:20의 전후 문맥을 보면 유다 백성들에게 구원이 약속되었으나 현재는 그들이 위험과 역경으로 극심한 곤란을 당하고 있던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잠깐 후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의 이 본문을 일차적으로 대하는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구약의 말씀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고난의 큰 싸움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하고 해서 우리가 시간적으로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시간 개념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당하는 고난이란 결코 시간적으로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측면에서 영생의 문제로 보자면 고난이란 그야말로 잠깐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지금까지 강조해온 인내의 필요성에 대해 이제 하박국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외치던 시대에 국가적 긴급 사태가 발생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에 그러한 하박국서의 인용은 지금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이 시점에 어떤 의미를 전해주는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국내적으로는 폭력과 불의와 부정이 난무하고, 외부적으로는 갈대아인들의 침략과 정복의 위협을 안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인용된 구절은 하박국 선지자의 그 고통스러운 물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1:2)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3,4)고 합니다.

하박국 2:3에서 정녕 응하리라는 말씀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갈대아인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시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가만히 지켜만 보신 것이 아니라 바벨론 사람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실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일을 추진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인, 즉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에 대한 신뢰와 인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대로 반드시 그렇게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지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망하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불의가 팽배하고 하나님의 율법이 무시되는 시대적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였지만 맨 마지막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3:17-19)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박국 3:16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가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일은 심히 떨리고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본 것은 심판만 본 것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셀라)”(13).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지라도 그 속에서 참된 주의 백성, 곧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시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시고 그들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을 남기심으로 그 남은 자를 통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것을 본 것입니다. 결국 메시야를 보내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잠깐 참으신 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그분을 공개하시고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의가 판을 치고 하나님의 율법이 무시되어 엉망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인 의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긍휼이 베풀어질 것을 믿기에 바벨론 사람들이 와서 모든 소출들을 다 걷어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삶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소출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기초하여 있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흔들릴 수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깨닫고 있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박국 선지서를 보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고 그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실 이가 오신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록자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만용이나 허세를 가지고 믿음 있는 척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언약의 피를 흘리신 그것에 근거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피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39)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유일한 근거는 언약의 피에 있지 세상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는 뒤로 물러가는 자가 아닙니다. 이미 목표가 하늘 성소라는 것을 알게 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하늘 성소를 향해서만 달려갈 뿐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록자가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하는 말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온전히 순종하신 그 예수님의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 장악된 자는 뒤로 물러가는 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사는 자가 아닙니다.

38절에서도 뒤로 물러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어 하늘 성소 생명의 자리에 두시는 데까지 약속을 이루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3:12-14)고 한 것입니다. 오실 이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