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여호수아

11.여호수아 11:1-23 북부 지역의 정복

불편한 진리 2014. 9. 5. 18:16

여호수아 11:1-23

북부 지역의 정복


1절에 보면 하솔 왕 야빈이 이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이 소식이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남부 지역을 하루에 진멸한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솔 왕은 가나안의 북부와 동서 편에 있는 족속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하여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 “그들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나왔으니 민중이 많아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말과 병거도 심히 많았으며 이 왕들이 모여 나아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메롬 물가에 함께 진쳤더라”(4,5).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많은 수의 군사와 병거였다. 힘에는 더 큰 힘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자 모든 가나안 족속들의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에 대적하는 인간적 사고방식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항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힘의 방식이 아닌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정신으로 철저히 응징하고자 하신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의 정신은 힘을 기르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힘을 빼고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것을 인정하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지시하신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6). 결국 8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고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가나안 족속들을 언약의 백성들에게 붙여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들을 진멸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북부 지역을 정복하게 하심으로 승리란 인간의 힘과 사람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와 병거의 많음에 놀라고 두려워 떨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숫자와 보이는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가나안 땅의 족속이요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라면 언약 백성들은 세상적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세상 힘의 특징은 모으는 데 있다. 힘을 모아서 무엇을 해 보자는 것이다. 상대편이 강하게 보이면 힘을 키워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눌러야 하는 것이 세상의 힘의 법칙이다. 즉 힘을 키우는 것이 세상의 대처 방식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 여러 공동체들(바리새파, 사두개파, 헤롯당, 열심당, 에센파 등)은 서로 교리와 사상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는 철저히 연합하고 공조했다.

최근에 기독교 서점에 가보니 교회 성장에 관한 책과 소위 말하는 요즘 뜨는 젊은 목회자들의 설교집 일색이었다. 그것도 한 출판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것만 장사가 되는 책이라는 말이다. 지금 출판계도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출판사는 잘 팔리는 책만 출판하고자 하고, 서점들은 잘 팔리지 않는 책은 금방 재고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처치곤란이라는 이유로 잘 팔리지 않는 신간 서적의 반입을 웬만하면 자제한다고 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온통 교회 성장, 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만 신경이 곤두 서 있다는 증거이다. 한 마디로 사람들을 모아 힘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교나 구제 교회 행사 이 모든 것이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돈이 교회의 힘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헌신이고 봉사이며 믿음 있는 증거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숫자와 병거를 의지하고 언약의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나온 가나안 족속과 같은 모습이다.

결국 오늘날 교회가 관심 가지고 있는 모든 일, 선교를 비롯한 어떤 교회 행사들이든지 그것은 세상적 힘의 과시일 뿐이다. 세상 것으로 힘을 삼는 자는 절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일임하지 않는다. 힘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냥 따라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병거를 불태우라고 하셨다(6). 말 뒷발의 힘줄을 끊는다는 것은 더 이상 말이 힘을 쓰거나 달리는 것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고 병거를 불태운다는 것은 더 이상 병거를 무기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과 병거는 전쟁을 계속하는 데 있어서 아주 유용한 전리품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해서 싸움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도록 하신다.

시편 33:16,17에 보면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힘을 모아서 그 힘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모은 힘을 흩으시고 무력하게 하셔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신다. 바울 사도가 이해한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3:7-9)고 했던 것이다.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학력, 사회적 지위, 혈통, 지식 이 모든 것들이 도움을 삼을만한 근거가 전혀 되지 않고 오히려 버려야 할 것들이라는 뜻이다. 성령 받은 바울 사도의 모습이 이러하였다면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의 모습 역시 바울과 같은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으로 죄와 의의 싸움이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도구로 선택받은 자들로서 전쟁에 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하나님의 전투에 도구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군대이다. 여호와의 군대는 세상의 싸움을 하지 않는다. 즉 숫자의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교회가 더 교인 수가 많은가? 일년 재정이 얼마이고 선교를 얼마나 하는가? 하는 이런 쓸데없는 싸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인간의 싸움이고 경쟁일 뿐이기 때문이다. 누구 집이 더 큰가? 누구의 차가 더 좋은가? 누구 아들이 공부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버는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싸움이다. 여호와의 싸움이 아닌 일에 성도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18-20절에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가나안 족속들이 진멸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심판 받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브온과 같이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지 않은 그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족속들로 하여금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은 죄악의 본성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의미이다. 즉 은혜를 입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반대로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는 가나안이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하신다. 이것은 은혜를 입은 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이다. 오직 택한 자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택함을 받지 않은 자들은 은혜를 입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9:15,16을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은혜를 받거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은혜를 베푸시는가? 한 마디로 약속이다. 그 약속의 실체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5:21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5,36)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도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1:4)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2:8).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악인이 진멸되고 오직 자신의 이름, 십자가의 피만이 온 땅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9:17)(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