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여호수아 8:1-35 아이 성
여호수아 8:1-35
아이 성
1절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다시 하셔야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간의 범죄를 아간 한 사람의 죄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보셨기 때문에 아간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에 대하여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간의 범죄를 언약을 어긴 것으로 보셨기 때문에(7:11) 무조건 가나안 땅에서 활개를 치며 땅을 뺏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라는 인식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려워 말라 내 약속에 의해 내가 준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확인시키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2절)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3절 이하에 보면 아이 성과의 싸움에서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작전을 가지고 전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사 삼만 명을 뽑아 성 뒤에 일부는 매복하고 일부는 성 앞에서 유인을 하여 멀리 떨어지면 성 뒤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아이 성을 점령하면 밖으로 나온 자들이 그것을 보고 다시 성으로 가려고 할 때에 도망하던 자들과 성을 점령한 자들이 동시에 앞뒤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진멸한다는 작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작전이나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나타내 보이신 것에 불과하다. 즉 여리고 성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기에 여리고 성을 돌도록 하셨지만 아이 성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내 보냈기 때문에 그에 따른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손발과 같고 무기와 같다.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 여호수아의 손에 잡힌 단창이다.
18,19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 처소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고 했고 26절에도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라고 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손발이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명령이 곧 이스라엘의 행동이며 움직임이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는 인간의 전술이나 전략이 필요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아이 성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에발 산에서 단을 쌓게 된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30절). 신명기 27장에 보면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보면 그리심 산이 축복을 선포하는 산이고 에발 산은 저주를 선포하는 산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단을 쌓는 장소가 그리심 산이 아니고 저주를 선포하는 산인 에발 산이라는 것이다.
33절에 의하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함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앞에는 축복 산과 저주 산이 있다. 그리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절반은 그리심 산에 서고 절반은 에발 산에 서게 한다. 그리고 34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의 말과 저주의 말을 낭독한다.
신명기 27장과 28장을 보면 축복과 저주의 율법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그 법을 말씀하시는 의도는 법을 잘 지켜서 저주를 받지 말고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절반은 그리심 산에 절반은 에발 산에 서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역시 복과는 상관이 없고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아야 하고 멸망을 당해야 할 자임을 율법을 통해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이 선포될 때에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바로 에발 산에 있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무엇 때문에 에발 산에서 단을 쌓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단지 단을 쌓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어떤 의미로 에발 산에서 단을 쌓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죄 용서는 희생의 제물이 흘린 피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제사는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면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31절에 의하면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라고 했다.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단’을 세우라고 하셨다. 신명기 27:5,6을 보면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다듬지 아니한 돌로 단을 세우라고 하셨는데 다듬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도와 노력과 공적이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철연장으로 다듬지 말라고 하셨다. 사무엘상 13:19,20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이스라엘에는 철연장을 만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철연장을 만들려면 블레셋으로 가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철연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블레셋과의 교류를 의미한다. 블레셋과의 교류는 곧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는 첩경이다. 이런 점에서 철연장으로 다듬지 말라는 것은 모든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인간적인 노력이나 공로를 가미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희생 제사가 드려지는 단에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인간적인 노력이나 공로가 결코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죄란 인간의 어떤 종교적 헌신과 노력, 공로와는 상관없이 전적인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이다.
결국 다듬지 않은 돌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는 것은, 죄란 희생 제물의 피만 가릴 수 있는 것이고 그 피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번제물이 되시고 화목 제물이 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이렇게 보여 주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화목 될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내세우고, 주일 성수를 자랑하고, 십일조하고, 선교하며 구제한 우리의 행위를 의로 여긴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손으로 다듬은 돌로 단을 쌓는 것이 되고 우리 스스로 그리심 산에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누구나 다 이것을 자신의 의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복이 어디에 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흔히 복은 그리심 산에 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심 산은 복을 받는 장소가 아니라 복을 선포하는 장소이다. 그리심 산에서 복을 선포하면 어디를 향해 하는가? 바로 에발 산을 향해서이다. 즉 저주 산인 에발 산에 복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에발 산에서 선포한 저주는 반대편인 그리심 산으로 향하게 된다. 결국 복과 저주가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고 나타나는 것이다.
복이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저주받을 자임을 아는 그 자리에 임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세리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복은 내가 행한 노력의 여하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다. 또는 저주를 내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상태이다. 죄인이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복이 하늘에서 오지 않으면 안 된다. 곧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게 되어 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저주받아야 할 자임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만 의지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곧 복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이러한 사실을 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이 성 공격을 통해서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는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간을 죽이심으로 죄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알고 저주에서 자신들을 건져줄 희생 제물의 피를 바라보아야 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엇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 보겠다는 의지, 정신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는 고백적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