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사무엘상 18:1-30 다윗에 대한 사울의 도전
사무엘상 18:1-30
다윗에 대한 사울의 도전
사무엘상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을 이스라엘 앞에 세워 사울과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셨다. 언약의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그 힘의 방식에 의해 세상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다윗이라는 사람을 보내서 세상의 힘을 거부하고 언약의 말씀에 근거한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18장을 이해할 때에도 17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근거로 생각해야 한다. 1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3절에서 “3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흔히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은데 성경은 결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이야기하려고 이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솝 우화나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에서 훨씬 더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실제 그것이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자. 요나단이 다윗을 처음 본 것은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이다. 물론 그 이전에 사울에게 악기를 연주할 때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사울도 주목하지 않았던 때였다. 이런 점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아마 가능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자기 이익을 위한 계산에 의해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을 사랑과 혼동한 것일 뿐이다.
사무엘상 20장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14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삼상 20:14-16)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통상적인 우정의 관계라고 하기 힘든 이유는 그들이 언약을 맺는다는 사실 자체에도 있지만 그들이 맺은 이 언약의 내용에도 있다. 당시의 상황은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사울이 왕이었고 아직 실권을 쥐고 있는 상태였기에 요나단이 왕의 아들로서 다윗에게 자비를 베풀고 도와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급한 마음으로 다윗과 언약을 맺으려고 하였다. 요나단은 한 번만 이 일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23장에서 다시 다윗과 언약을 확인한다.
16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상 23:16-18)
요나단은 거듭하여 언약을 확인하면서 다윗에게 자신을 살려 줄 것과 자신의 후손들도 살려 줄 것을 부탁한다. 요나단이 다윗과 맺는 언약은 동등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언약이 아니다. 그 증거가 요나단이 언약을 맺으면서 다윗에게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주었다. 겉옷과 무기를 주는 이러한 행위는 요나단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고 다윗에게 완전히 굴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자신에게 주어질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나가실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계신다.
사울이 다윗을 군대의 사령관으로 세우니 그가 출전한 전쟁은 다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자 수많은 여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을 두고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라고 노래하였다. 사울은 이 노래로 인해 심한 분노를 느낄뿐만 아니라 다윗을 견제의 대상으로 삼으며 급기야는 죽이기로 결심한다. 사울의 이런 모습은 악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12,14,28절)으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떠나신 사람(12절)으로 강조한다. 이것은 다윗과 사울 사이의 극명한 대조일 뿐 아니라 이후에 나타나는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인생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였다거나 하나님께서 다윗과 동행하신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울의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주셨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다윗에 대한 사울의 도전, 그로 인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이나 다윗을 제거하려는 간계 등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사울의 마음과 행위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도전이고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사울이 다윗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으로 간계와 계략을 가지고 행하나(17-19,20-27절) 다윗은 지혜롭게 행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5,14-15,18,23,30절). 사울이 간계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고 다윗이 지혜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사울 왕이 다윗을 천부장 삼은 것도 다윗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고 왕 주변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간계였다(13절). 그러나 다윗은 지혜롭게 행하였다. 다윗이 지혜롭게 행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함께 하신 결과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주문과 함께 딸 메랍을 주겠다고 할 때에도(17절) 사실은 다윗을 전장으로 내몰아 죽게 하려는 음모였고 또한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꾸민다(20-27절).
장인 될 사람에게 신부에 대해 지불할 재물이 없는 가난한 사람 다윗에게 미갈을 위한 신부대금을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으로 바꾸어주며 마치 큰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생색을 낼 때도 사실 속셈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다(25절). 그러나 줄기찬 술책과 음모를 시도한 끝에 사울이 발견한 것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여 사울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도전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간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십자가를 거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도전하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은혜를 입은 자는 자신이 죽어야 할 십자가로 생각하고 말씀에 복종하며 늘 자신을 죽이는 자로 살아간다.
성경은 요나단과 다윗을 통해 이러한 언약적 사랑을 보여 주셨다. 언제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바로 새 언약을 직접 성취하고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언약의 관계이고 사랑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언약 안에서는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법을 초월한다. 결코 ‘주일을 얼마나 잘 지키며 십일조를 얼마나 정확하게 하며 전도를 얼마나 했으며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로 묻지 않는다. 만약 그런 물음을 한다면 그것은 법적인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즉 법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자기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다. 이것이 언약의 관계이다. 그 언약 안에 부름 받은 성도는 오직 주님만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세상과 세상의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가?(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