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17.사무엘상 16:1-23 기름 부음 받은 다윗

불편한 진리 2014. 8. 30. 13:17


사무엘상 16:1-23

기름부음 받은 다윗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국을 폐하기로 하셨다. 사울의 왕위만 아니라 그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 자체를 거부하셨다. 사울은 애초에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울이 처음과 같이 계속 겸손한 모습을 유지하였다면 버림받지 않고 그의 왕권과 나라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사울이라는 인물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인간들이 요구하는 왕의 모습과 그 결말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선택된 존재이다.

따라서 사울 왕의 자손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왕통을 이어가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계획 속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를 통해 주셨던 노래에서처럼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일으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언약을 이루실 것이다. 애초에 원하셨던 언약의 왕을 세워 언약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곧장 실행에 옮기신다.

1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라고 기록하였다. 사무엘이 슬퍼했다는 것은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울이 왕의 자리에서 버림당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닥칠 혼란을 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는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계속 슬퍼한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셨다는 점이다. 결국 사무엘이 계속 슬퍼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그것에 대한 완벽한 계획과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고 명하신다. 이새의 집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미 언약을 위한 왕을 준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국이 지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사울 왕의 폐위와 그의 왕국을 끝내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언약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 왕국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왕국이었으며 모세의 율법이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언약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진정한 여자의 후손으로서 오시는 메시아 왕국의 그림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가 오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위해 친히 준비해 두시고 철두철미하게 진행해 나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일하심을 잘 알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근심하고 때로는 슬퍼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의심하기도 한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이르자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이 떨면서 말하기를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장로들이 사무엘의 등장에 떨면서 이렇게 묻는 이유는 선지자의 등장은 언제나 잘못을 책망하고 지적하면서 심판을 선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에 대하여 사무엘이 평강을 위함이라는 대답을 통해서 볼 때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사무엘이 왕을 세우는 일이 평강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에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한다. 이새의 아들들이 오자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실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부하셨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사무엘이 본 것은 용모와 신장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중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쉬운성경에는 마음이라고 하였고 우리말성경에는 마음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이런 번역을 가지고 우리는 쉽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마음의 성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성품이란 무엇인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도덕적인 성품이나 성실한 자세를 말한다고 본다면 이새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형편없는 인간들이 되고 다윗은 여러 형제들 가운데 가장 윤리적이며 성실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윤리적으로 성실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된 후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충신을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다. 이렇게 말하면 다윗은 원래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어쩌다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일 뿐이라고 답할 것인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우리의 시각으로 해석한 결론에 끼워 맞추기 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단순히 마음의 성품을 보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신약에서도 이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행전 10:34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론하면서 이 말씀을 하는데 사람이 외모를 취하는 것을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미리 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씀하였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2:11에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고 하였다(2:10). 또한 에베소서 6:9, 골로새서 3:25에서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야고보서 2:1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다 같이 받은 자라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즉 이 모든 신약의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한 마디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위한 계획을 미리 심어놓은 자를 보신다는 뜻이다. 그 의미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심어진 자를 말하고 그 의가 심겨진 자는 외부에 드러난 어떤 행위의 문제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심겨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의 의가 드러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들을 다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자로 선택된 자는 없었다. 그래서 이새에게 아들이 더 없느냐고 물으니 막내아들이 양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새의 이 말 속에 어린 다윗에 대해서 어리고 막내라는 이유로 양이나 지키고 있도록 한 무시하는 마음이 비친다. 다윗의 아버지가 그러하였다면 객관적인 평가에 의해 다윗이 왕이 될 만한 인물로 인정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뜻이다.

12절에서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살결이 불그스레하고 눈이 빛나는 잘생긴 소년-쉬운성경)는 말씀은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의미라기보다 아직 어린 아이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외모를 표현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다윗의 중심을 보고 계셨기에 즉시 그에게 기름을 붓도록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여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외형적인 문제로 제외하고 거부하는 것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하심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처음부터 막내아들 다윗이라고 사무엘에게 계시해 주시지 않고 모든 아들들을 다 보게 하셨는가 하는 의문의 답이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막내아들 다윗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면 사무엘의 일처리가 훨씬 쉬웠을텐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부정하시기 위해서였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왕으로 생각하였던 것은 사울을 세운 것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은 사고방식이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사무엘조차도 인간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고 정신 상태였다는 것을 고발하심과 동시에 언약을 위해 하나님께서 철저히 계획하시고 친히 개입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판단과 기준은 언제나 실수와 잘못됨을 유발하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에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 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자는 무조건 왕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외모가 뛰어나지 않고 특출하지 않아야만 왕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자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고 세우신 것은 외형적인 조건이 왕으로서 일을 하는 힘과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사무엘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3)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자기 영광을 위해 기름 부으신 자를 친히 선택하고 세우신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한 자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에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시며 언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13절과 14절은 기록자가 의도적으로 서로 대조하도록 연결하여 기록하였다. 다윗에는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으나 사울에게는 악한 영이 임하여 그를 번뇌하게 하였다. 사울에게 임한 악한 영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내서 그 영을 좇아가도록 조장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울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악한 영을 좇아 사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사울은 신하의 요청으로 다윗을 청하여 자신을 위해 봉사해 달라고 부탁내지는 명령을 한다. 여기서 다윗은 양치는 자’(19)로 소개된다. 그저 단순히 양치는 자로 소개되었다는 것은 철저히 다윗이 무시된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거부를 당한 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롭게 기름부음을 받은 다른 왕에게서 위안을 얻으려 하고 있다.

세상의 역사관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준비하는 역사관이다. 즉 미래를 위해 꿈을 가지고 내가 지금 잘 준비하고 있으면 원하는 목표대로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관은 미래를 위해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준비한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일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다시 보내실 일을 준비하고 계시고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