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13.히브리서 6:1-8 하늘의 은사

불편한 진리 2014. 6. 30. 21:06

하늘의 은사
히브리서 6:1-8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4-6절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예수 믿는 자가 되었더라도 계속해서 성숙한 신자가 되지 못한다면 도태되어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다는 말씀입니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는 장로교회에서 예정론이라는 것 때문에 한 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만나면 상당히 난처해하고 무척 당황스러워 합니다. 저 자신도 과거에 예정론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이 본문을 가지고 질문도 많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마는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이 말씀을 강론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성경 본문은 결코 예정론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을 강론하면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말이 나올지라도 구체적으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본문이 예정론을 설명하는 의도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히브리서 기록자는 5장과 연관된 말씀으로 계속 써 내려 가고 있습니다. 5장에서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히브리서 기록자는 5:11에서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멜기세덱에 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막연히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록자는 젖먹이와 장성한 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여기서 젖먹이와 장성한 자에 대한 말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약만 알고 구약 시대에 얽매여 있는 자와 구약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성취된 것을 믿는 자를 구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젖먹이는 구약에만 매여 있기 때문에 단단한 식물, 즉 왜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니면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나 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셨는가 하는 이런 십자가에 관한 모든 진리들을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1절에 ‘그러므로’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는 말은 5:12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와 같은 말입니다. 즉 구약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러한 상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믿는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여기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3절)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신 결과로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진리는 우리가 공부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이 지나가면 자동적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밑으로 다 빠져버리지만 콩나물은 자라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이 없어도 교회에 오랫동안이라도 다니면서 설교를 들으면 반드시 남는 것이 있고 신앙이 자라게 된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히브리서 기록자는 4절 이하에서 계속 구체적인 설명을 더해가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4-6절).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얼마든지 한 번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맛보았다고 할지라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회개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장을 고려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구원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구원하신다는 것은 반대로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구원받지 못하는 자리에 두실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지옥을 만들었는가? 혹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두 구원하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등등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온갖 질문을 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질문의 배경 속에 어떤 것이 깔려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반발심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만나시고 천국에 넣어줄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 쪽에서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어떤 자도 하나님의 언약에 흡족한 자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실패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고 버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위하여 선택하시고, 언약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즉 버리기 위하여 선택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은 언약을 위한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란 구약 때부터 있어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에서 선택이란 개념을 전부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시켜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정되어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은 일의 맨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정되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 신앙인(또는 선택된 자)에게 필요하다면 예정의 섭리가 가지고 있는 은총은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난 뒤에 알려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정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약에서 바울 사도를 통해 던져진 예정이라는 개념은(엡 1:5)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철저히 구약 안에서 먼저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인간 실패의 장(場)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란 신약에서 왜 예정이라는 말이 요구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자들입니다. 기대를 할 수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남기셔서(남은 자)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언약의 실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자신의 살과 피를 기억하도록 성만찬을 가지면서 새 언약을 세우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눅 22:19-20).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신 그것이 바로 언약의 완성이요 새 언약 자체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개인적으로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함으로 아담 한 개인만 에덴에서 추방당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란 죽었던 피조 세계를 생명이신 하나님 안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초월한 새로운 세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다는 것은 바로 이 세계를 위해 선택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했다는 것에서 만족하는 차원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선택되었느냐 하는 것을 늘 자기 스스로에게 묻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 쪽으로 늘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힘이나 노력, 자신의 종교적 행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자신을 끌고 가고 있음을 느끼고 늘 그렇게 고백하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마 16:24).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은 만물의 회복이라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하시겠다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예정이라는 개념도 이럴 때 비로소 동원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구원을 합리화하거나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예정이라는 개념을 끌고 들어와서는 안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통일된 세상을 세우기 위해 자기 백성들의 참여를 예정하신 것이라는 차원에서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예정의 관심사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그 몸입니다. 종말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전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예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개인을 예정하시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예정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이 믿어진 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분만을 향해 사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택의 방향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입는 자가 있는가 하면 또한 버림을 받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와해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써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으로써 합당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잘라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많은 교인들은 자기 개인의 구원만 기대하고 있지 주님의 몸으로써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무조건 신비한 경험을 하였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고 그 은사를 맛보았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고 하면서 결코 타락할 수 없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면 그것은 목사가 교인들을 목회라는 자기 사업장에 계속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비췸을 얻고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을 협박해서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은혜를 베풂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나 자신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늘 십자가를 향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자가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늘 자기 자신에게 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나도 신앙생활 잘하다가도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이런 생각이 누구에게나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들 때에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반발심인 것을 발견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거부감이 내 속에 늘 자리하고 있는 죄인임을 늘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다시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것을 발견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그 관심이 십자가에로 돌려진다면 오늘도 믿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7,8절에서 동일한 비를 받되 채소를 내는 현상과 엉겅퀴를 내는 현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 공부를 얼마나 하느냐 하는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항상 나 자신을 중심으로 일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도 인간의 친목 단체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개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오늘날 교회 개척은 대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에 부목사로 있던 목회자가 개척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개척하기 위해서 상가 건물을 임대하기 위하여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곳이 있으면 계약을 합니다. 그리고는 나머지 잔금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잔금을 치르고는 교회 간판을 겁니다. 홀을 채울 의자, 강대상 등을 구걸하러 선배 목사님들 교회나 노회에 찾아갑니다. 개척교회 하는 이 귀중한 선교에 동참해 주십사 하고 손을 벌립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시설이 되고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이 갖추어지면 사람들을 모읍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조직을 구성합니다. 점차적으로 교인 수가 많아지면 예배당을 건축합니다.
이를 두고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고 합니다. 인간이 세상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힘이 약화된 것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절대 폐기처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가지고 결국 예정된 구원론과 하나님의 선택론까지 결부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를 하나의 거대하고 튼튼한 자기 아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것을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일곱 교회를 예를 들어서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들이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 2:7, 11, 17, 26, 3:5, 12, 21). 죄악에 이기는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이기는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항상 건재합니다. 아니 참된 주님의 교회는 늘 죄악에 이기어 어떤 세력, 심지어 음부의 세력도 넘볼 수 없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오직 십자가의 주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성교회가 박살나도 괜찮다고 믿습니까? 주성교회가 박살나도 주님의 교회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당해 해산된 것 같아 보여도 주님은 여전히 살아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성교회는 날마다 깨어지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살아 계신 주님만으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주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내 욕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시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