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히브리서

11.히브리서 5:1-10 멜기세덱의 반차

불편한 진리 2014. 6. 30. 21:03

멜기세덱의 반차

히브리서 5:1-10


지난 6일에는 저희 가족이 강화도에 갔었습니다. 강화도에서 약 15분 동안 배를 타고 더 들어가면 석모도라고 하는 섬에 유명한 사찰에 가 보았습니다. ‘용왕대재’를 지낸다고 크게 현수막을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용왕까지 섬기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절 뒤편 산에 가보니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부처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장사를 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이란 산, 바다, 큰 바위, 고목만 보아도 거기에 무슨 영험이 있는가 하여 신비한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나게 큰 바위에 부처상을 조각해 놓았으니 장사가 안 될 수가 없겠지요. 오면서 오늘날 기독교도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여 마치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꾸미고 그 엄숙함에 압도당하게 만드는 것과 큰 부처상 앞에 압도당해 엄숙함을 느끼게 만드는 것과 다릅니까? 제가 볼 때에는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십자가마저도 부적처럼 남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빨간 네온을 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때가 있더니 요즘은 저마다 튀는 색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얀 네온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평화를 상징한다고 갖다 붙입니다. 무엇이든 영험한 것이 있고 종교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조그만 것이라도 종교적 문화로 만들고 확대하여 거기에 온갖 의미들을 부여하는 인간의 종교성은 항상 우상을 섬기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십자가는 우리 임의대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 확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확정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1:21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나심에 대하여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요셉에게 전달할 때에 계시된 말씀입니다.

여기에 보면 세상에 오신 메시야에 대하여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름 안에 예수님을 보내신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확정되어져 있는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께 나와서 인간의 소망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독자적인 자기 계획과 목적을 세우시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전 생애를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사셨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목표로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은 십자가로 이미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가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오직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목적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뜻에 맞는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뜻을 이루고 성취해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소원과 내 뜻을 들고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예수, 자기 예수를 찾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모든 일이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을 믿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도들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수님을 부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로 확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고 하나님에 의해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1-4절 말씀을 통해 구약에서 대제사장 직분의 자격 요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고, 5-10절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제사장 직분의 가격 요건에 대하여 완벽하게 갖추신 분으로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나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가 왜 이렇게 구약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제사장의 특징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세움을 받아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했습니다(1절). 즉 이스라엘 중에서 취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이란 백성들의 고민과 실패를 아는 자였습니다. 사람이면서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2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무식하고 미혹한 자’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여 세상적 유혹에 싸여 있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제사장들이 용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제사장 자신도 그들과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서 자기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절).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은 사람들이 세우거나 자기 스스로 제사장이 되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선출하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방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4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불러서 세우시는 것이지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을 세워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신 것은 그가 행하는 제사 직무를 통해 장차 누군가가 와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그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스스로 취하심이 아니라 구약 시대로부터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시편 2:7을 들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6절에서는 시편 110:4을 인용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합니다.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하지만 아론의 반차를 좇아서 난다면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론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들은 전부 자기를 위한 제사를 드린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론의 반차를 좇아서 온다면 여전히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죄 아래에 있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론과 같은 형식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아 대제사장으로 오셨지만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죄인의 반차인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고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고 하는 것은 아론의 반차와는 다른 하나님의 반차, 즉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에 의해 낳음을 입은 모습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시편 2:7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낳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다는 말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 상태를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직분으로 설명되어 있다면 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대제사장 직무의 완벽한 수행을 표현하는 말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으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는 창세기에 멜기세덱이 등장하고 있는 본문을 살펴봄으로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4:17-20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여기에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나와 있는데 그는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살렘 왕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제사를 드리러 나온 자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온 자입니다. 속죄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는 제사장의 모습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한 아브라함을 마중 나온 왕으로서의 제사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아브라함과 함께 인정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선포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의한 대제사장적 역할은 단순히 십자가에 순종함으로 고난과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성소에 들어감으로 완전하고 두 번 다시 드릴 것이 없는 단번의 제사를 드린 것이 되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에서 하나님에 의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무수한 고난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자기를 구원하실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7절). 자기를 구원하실 하나님만을 바라본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 그것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극복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님께는 하늘 보좌라는 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의 영광이라는 것 이전에 이 땅에 육체로 계실 때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제사장이 사람 가운데서 취하여 하나님께 속한 일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속하여 하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이 땅에 속했지만 하늘의 일을 한다고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위한 속죄가 전제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하늘에 속한 분으로서 이 땅에 참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신 곳은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희생의 피를 뿌려야 했던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10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을 예수님이 온전히 수행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고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9절)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고 믿어야 하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 다른 어떤 존재라고 이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죄 때문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로 하셨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로 확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하늘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러한 예수님을 보여 주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보여 주고자합니다. 잘 지은 예배당을 자랑하고자 할뿐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하나님의 아들로 왕이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엄연히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목사가 대제사장인 것처럼 가운을 입고 붉은 후드로 꾸미고 예수님을 가리고 서 있습니다. 어리석은 민중들은 자기 종교성에 매여서 거기에 절을 하며 구원을 얻고자 침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를 바라보고 악마의 수하에서 종노릇하면서 함께 문화 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재주나 학벌, 재산 또는 말과 지혜로 십자가의 주님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