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소선지서

02.스바냐 2:1-15 유다와 열방들

불편한 진리 2014. 4. 9. 13:28

유다와 열방들
스바냐 2:1-15
 
 
스바냐 1장에서 선언되었던 하나님의 심판이 2장 3장에서 구체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창조하신 것들을 무효화 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때에 진노하신 것처럼 진노하셔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가 2장에서 열방들에게 어떻게 미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블레셋(4-5절), 모압과 암몬(8-11절), 구스(애굽)과 앗수르(12-15절)에 대한 죄악을 들추어내면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심판하실 때에 반드시 이방인들의 멸망도 포함시키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모든 열방들 역시 유다(이스라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고 하셨습니다. 이후부터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로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안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씨가 잉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곧 이스라엘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에는 전쟁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그 전쟁은 곧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서 승리하는 전쟁입니다. 그 승리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밟으므로 승리하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안에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실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유다)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문제로 열방들을 다스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이 유다를 어떻게 대했기에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까? 10절에 그 근거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서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이니라.” 이방인들의 교만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교만이란 윤리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약속을 가지고 일하시는 분이시며, 약속을 가지고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방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유다를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의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신들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고대 사회에서 전쟁은 각 족속들의 신들을 배경으로 하며, 전쟁에서의 승리는 곧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자신이 마음대로 무효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며 하나님만이 참신임을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방들의 교만이란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무효화 시키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의 약속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시고 이루신 십자가의 새 언약을 믿느냐 믿지 않는냐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할 수만 있으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치 지금 스바냐 때에 이방인들이 유다를 대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이방인 취급하셨고 이방인들 중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퇴학시킨 학교가 아직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학교가 오늘날 신자들을 퇴학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6-7절). 블레셋의 땅이 변하여 목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누구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까? “유다 족속의 남은 자”라고 합니다. 유다 족속이 거기서 가축을 기르고 양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유다 족속(이스라엘)이 아니라 유다 족속에서 “남은 자”(남겨진 자)라는 것입니다. 유다 족속이 다 유다 족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합당하게 살 수 있는 자를 다시 재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남은 자는 스스로 남을 수 있어서 남은 자가 아니라 누구에 의해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7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셔서 남겨진 자들이라야 합니다. 곧 주님께서 돌보시는 자만이 남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소외당하고 쫓겨나며 무시당한 자들이 주님에 의해 남겨진 자들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어려움을 당하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가 눈물을 흘릴 때에 그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자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을 버린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고 찔림을 당한 자들의 원수를 철저히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원수를 갚으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 맡기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원수들을 향해서 복을 비는 위치에서 살아가는 자가 진정 복된 존재임을 말씀으로 늘 확인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