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히브리서 2:1-4 큰 구원
큰 구원
히브리서 2: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상당히 무서운 경고인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겁을 주고 협박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우리들에게 위협을 하고 겁을 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겁을 준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겁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를 무시하는 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본래부터 예수를 무시하게 되어 있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성경이란 예수를 믿기 위해서 혹은 예수를 믿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보는 책이 아니라 성령 받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보는 책입니다. 물론 성경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책이고 누구나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성령을 허락하시고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믿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보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고,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여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근거를 인간 편에 두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야 비로소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면 성령님 역시 우리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면 결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요일 2:27). 성령을 받으면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풀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성령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신 결과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성도에게 주는 경고나 협박 정도로 본다면 하나님의 본뜻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습니까?
1절에서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들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은 것’이 어떤 내용입니까?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 히브리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님이란 어떤 분입니까? 구속자요 또한 창조주로서 지금도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밝혔습니다(히 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로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기에 세상의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고 특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천사가 숭배의 대상이 된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사보다 우월하실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종말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복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는 이미 이 복음에 대하여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히브리서 기록자가 전하고 있는 복음이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대하여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하거나 등한히 여길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라는 뜻에서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한다고 단호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당시에는 박해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박해를 받아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나 근거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흘러 떠내려갈까”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히브리서 기록자는 표류하는 배에 대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신앙의 확실한 근거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에도 보면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을 풍랑이 일고 있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의 닻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분이 언약을 성취하신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배가 항로를 잃고 표류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2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란 기본적으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옛 언약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 가운데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천사를 중보자로 해서 주셨다는 명시적인 구절은 없지만 신약의 몇 구절들은 율법이 천사를 통해 전달되었다고 시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스데반의 강론에 보면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 7:53)고 했고, 갈라디아서 3:19에도 보면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율법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했다는 뜻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어쨌든 본문에서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3절에서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라는 표현과 강하게 대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보다 주님으로 말씀하신 그것이 더욱 확실하고 완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주의 깊게 보면 천사에 의해 전달된 것이 ‘율법’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엄격한 훈육의 법전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의 은혜로운 나타나심, 즉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 율법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타내주고 있는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말씀(옛 언약)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말씀(새 언약) 사이의 비교는 하나는 불완전한 것이고 하나는 완전한 것이라는 뜻으로의 비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는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비교인 것입니다. 옛 언약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로써 충분하고 완전했지만 새 언약의 입장에서 보자면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부분적이며 불충분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체에 비해서 보자면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은 완전하며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3절).
이렇게 충분하고 완전한 구원의 소식, 즉 복음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아니 어떤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까? 히브리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단순히 말씀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로 말씀하셨다면 그에 따른 하나님의 행위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반응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결과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들어 내신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어기거나 가볍게 여긴 자들이 옛 언약에서 심각하게 취급을 당했다면 율법보다 더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에 의해 심판은 이제 확연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김없이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이 무서우면 이제부터라도 예수를 잘 믿으라고 본문을 통해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씀으로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고 완전한 것이며 온전히 충족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이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서운 심판의 말씀을 듣고 겁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기록자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구원,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 얼마나 열심을 가지고 일하셨는가를 알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을 베푸신 것은 주로 말씀하신 바, 즉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종말에 아들로 나타내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구약 시대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서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히브리서를 기록할 당시까지도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들을 통해 증거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으로, 그리고 성령의 나눠주신 것, 즉 은사를 주시는 것을 통해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표적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씀으로 나타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율법을 무시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 되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아들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 땅에 선포되었을 때에 그 말씀을 귀하게 여긴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에 이미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스스로 믿은 자 누가 있으며 누가 그분을 귀하여 여겼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귀하게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했었습니다. 오히려 그를 멸시하고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막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아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사 53:4). 이런 점에서 십자가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마저도 무시한 인간의 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무시하고 모독한 것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얻고자 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남에게 자존심 꺾이지 않고 당당하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남부럽지 않는 은사를 받고자 하는 것에 우리 기도의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교회를 키워보려고 하는 목회자의 비전은 목회 실패했다는 주위의 시선과 조롱을 잠재우고자 하는 욕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것들에 관심 가지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고, 교인 수를 많게 하여 큰 예배당 짓고 기도원과 묘지를 사들이고 교회 차량 수를 늘이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히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향해서는 물질을 사랑하지 말하고 하면서 교회는 물질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돈을 거두고 부동산을 축적하는 것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시키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돈을 사랑하면 안 되고 교회는 돈을 사랑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언제 주님이 돈으로 전도하고 구제하셨습니까?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의 모습 역시 성도 개개인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습을 지닌 성도나 교회와 주님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주님이 함께 하신 성도요 교회이기 때문에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구약의 성도들이 천사들로 하신 말씀을 받고 공변된 보응을 받은 것을 기억하여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성도된 생활에 대하여 성실하라, 충성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받을 벌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렇게 협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란 그의 아들을 통해 베풀어진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 구원인지를 알고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베풀어진 십자가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반드시 아들과 같은 운명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이상 반드시 그 결과를 만들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면 세상의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날마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놀란 성도라면 세상의 어떤 것도 존귀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5-19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또한 오늘 모인 우리들이 서로에게 빌 수 있는 축복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