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히브리서 1:1-3 마지막 말씀
마지막 말씀
히브리서 1:1-3
어떤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외국에 갔습니다. 포도 열매를 딸 때가 되어 세를 받기 위하여 자기 종들을 보내었습니다. 아마 주인이 쉽게 올 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세를 주기는커녕 주인의 종들을 잡아서 때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아마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주인의 종들만 처치하면 자기들을 괴롭힐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이 마치 자기들의 것인 양 행세했습니다. 이제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냈지만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아들을 보내게 됩니다. 적어도 아들은 공경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주인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오히려 크게 반전되고 말았습니다. 농부의 마음은 전혀 딴 데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죽이면 상속자가 없기 때문에 포도원은 영원히 자신들의 것이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아들까지 포도원에서 내어 쫓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21:33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농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입니다. 또한 종은 선지자들이며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왜 열매가 없었습니까?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경건과 형식들이 무성했습니다. 절기도 철저히 지키고 금식도 하며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마 6:2). 뿐만 아니라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고(마 23:23), 전도도 아주 열심히 하였습니다(마 23:15). 성경도 부지런히 연구하였습니다(요 5:39). 그럼에도 주인에게 내어놓을 열매가 없다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주인이 요구한 열매와는 상관이 없는 자기들의 열매였습니다. 종과 아들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농부들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는 열매가 자기들에게 없기 때문에 종과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목표와 뜻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 전도를 열심히 하며, 십일조를 바치고 절기를 지키는 것, 성경 연구 이 모든 것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다 자기 열매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죽으라고 열심히 한 것들이 모두 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에 의한 의식과 절기, 제도들을 주심으로 죄인들이란 그것들은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종교적 틀에 매이고 만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적 의식이나 제도가 아닌 예수님이 직접 오실 수밖에 없었고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건을 단순히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포도원에 대한 비유입니다. 율법을 얼마만큼 잘 지켰느냐 잘 지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천국 백성이 정해진다는 것을 비유로 나타내셨습니다.
오늘부터 강론할 히브리서는 바로 이 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구약과 대조하여 철저히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그것을 1,2절을 시작하면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많은 종들을 보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참 선지자들을 받아들이기보다 거짓 선지자들과 야합하며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나타내신 것과는 달리 유일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서 “말씀하셨으니”라는 과거 시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종료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꿈이나 환상, 천사들을 통하거나 아니면 이적 혹은 선지자들을 통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이 끝났습니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르게 말씀하실 이유가 없고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더 이상 부족한 것도 온전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은혜의 궁극적인 말씀이며 동시에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씀은 ‘이 모든 날 마지막 날들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종말이 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사람들을 향한 최후의 통첩이며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에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이신 말씀이 다 드러났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가 없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마지막 말씀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다 드러날 만큼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다른 무엇을 더 이상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문제는 종말을 사는 자로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종말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을 가리키는 함축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에 드러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2절에 보니까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후사”라고 했습니다. ‘만유의 후사’란 상속자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상속자입니까? 마태복음 28:18에 의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실로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아니 그분은 본래 모든 세계를 지으신 분이라고 2절 하반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구속자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골 1:15-20). 그래서 요한복음 1:1에서는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한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만 관심 가진 자를 두고 성도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이 땅에 드러내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가 주님의 몸인 교회입니다. 히브리서는 처음 시작부터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히브리서를 살펴보면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위한 말씀으로 생각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열매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열매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결과만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 그 의미는 너무도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 그 의미는 단순히 말하고 듣는 차원에서의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행위와 동일한 의미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천지창조 당시의 상황을 보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한참 후에나 혹은 누군가가 빛이 있게 해서 빛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되자마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결과로 빛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마지막 날들에 온전히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응답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안믿을 것인가를 고민하여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 말미암아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도 못하고 응답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야 한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나 ‘아니오’로 대답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나타난 종말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자와 아닌 자가 하나님 말씀에 의해 갈라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1:33 이하의 ‘포도원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하나님께서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을 오직 주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게 된 자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가져야 하는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종교적 제도나 의식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십자가를 향해 사셨던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여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19-22)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십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도 충만히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얼른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직도 땅의 것에 미련이 많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불만스럽고 모자라는 것이 자신에게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건강했으면, 좀 더 능력 있고, 좀 더 좋은 조건과 환경과 지위와 권세가 있었으면 하고 바랄 수가 있으나 그것은 망상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신령한 문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복음에 관한 것 외에는 일차적인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야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우리 안에 있는 말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세상의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감사가 아니라 부족하고 모자라며 세상적으로 행복하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16:27).
그리스도 이상 더 필요하지도 않고 필요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권면이나 필요한 모든 것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는 것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다윗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소유하고 있고 그 주인이 바로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아쉬운 것이 있고 소원이 있기 때문에 자꾸 모세의 능력, 엘리야의 이적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사실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말씀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더 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던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바라지도 않았던 존재입니다. 선지자도 바라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문제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존재였습니다. 구원이란 말 자체도 할 수 없었고 모르고 있었던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생명을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한다는 교만을 부리지 마십시오. 필요하시다면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 또 다른 이적, 색다른 하나님의 말씀 그런 것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서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그 부자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천국에 갔다 온 간증을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믿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 종말의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을 믿게 하려고 천국 갔다 온 사람을 불러 간증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택한 백성들까지 미혹하려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종말을 사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