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리 2009. 8. 24. 20:01

목사란?

 

 

몇 년 전 필자가 목사 임직을 받을 때에 가장 많이 받은 인사가 “목사님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에도 축하하는 것을 흔히 보았다. 목사가 되는 것이 축하할 일인가? 나름대로 생각을 해본다. 목사도 목사이기 이전에 죄인이고 또한 한 사람의 성도이다. 한 사람의 성도로서 주님의 때와 뜻이 있어서 목사라는 직분으로 주님을 섬기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다양하게 주어진 직분일 따름이다(엡 4:12-13).

목사가 되는 것이 그렇게 축하할 일이라면 왜 (서리)집사가 된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의 축하가 없을 뿐더러 집사의 직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 장로직은 귀히 여기면서 집사직은 무시하는가? 그것은 분명 계급 의식에서 연유된 것이리라. 목사가 되면 교회의 최고(?) 직에 오른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다 된 것처럼 말이다. “목사가 되면 말을 안듣는다”는 어느 노목사님의 말씀도 아마 그래서 나온 말일게다.

 

그래서 그런지 목사가 되면 교회의 장로들과 미묘한 관계로 힘겨루기(power game)를 하게 된다. 마치 사립학교 같다. 장로와 권사는 학교를 위해 재정을 출자한 이사장이요 목사는 그 학교에 청빙된 교장이다. 평신도인 우리는 헌금을 팍팍해서 당신이 먹고사는 것을 책임져 줄테니 목사님은 다른 것에 신경쓰지 말고 부지런히 교인들이 사업장을 통해 축복받도록 기도하고, 또 시간 날 때마다 심방해서 교회나 부흥시키라는 요구를 한다. 일종의 계약 관계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도 부흥의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성장의 효과가 없으면 목사를 내보내든지 호봉수를 낮추든지 해야겠다는 말이 교인들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사는 살아남기 위해서 평신도를 병신도(?)로 만든다는 말이 나돈다. 과연 목사와 성도들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아니 그러한 관계를 생각하기 이전에 교회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래전 어떤 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교회에 교역자가 없으면 교회가 유지됩니까? 안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안된다는 답변이었다.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은 목사의 존재 유무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교회의 교회됨은 목사가 있어야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요 죄인인) 목사가 반드시 있어야 유지되는 교회라면 애초부터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성취하신 십자가의 새 언약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이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기신 그 권세로 지금도 다스리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다. 이러한 주님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그 고백을 담고 있는 자들이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란 필연적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감으로 그 십자가의 주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목사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교인들을 섬기는 자가 목사의 할 일이 아닌가? 이 일을 바르게 행하기 위해서 목사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먼저 연구하고 깨달아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증거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여야 한다. 주님의 자리에서 대접받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목사는 눈에 보이는 주님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는 얼마나 목사의 자리에서 주님을 보여주지 못하고 목사의 자리에서 목사를 보여주려고 한다. 목사의 기도가 더 효험 있는 기도로 생각되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하늘에서 여전히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도록 만든다. 목사의 심방이 있어야 재앙이 물러가는 것으로 가르치는 마귀의 몫을 톡톡히 함으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가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목사를 무당화하는 작업은 마귀에 의해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윗이라는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라는 왕을 세워 인간 왕이 필요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왕이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 왕의 무능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결국 그 일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홀로 이루시는 구원이요 하나님 홀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인간 왕을 세우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란 목사로서 하나님 일에 필요하기 때문에 세움을 입었다든지 혹은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안된다든지 아니면 목사가 있어야 복음이 증거된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목사 없어도 주님의 일은 주님이 홀로 알아서 하신다. 주님께서는 목사를 교인들 앞에 세우셔서 그것을 증거하게 하신다. 그런데 목사가 나서서 우리가 없으면 주님의 일이 되지 않는다고 선포한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종이 아니다. 종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갈 1:10).

 

태평양의 어느 한 섬에서 행해지는 풍습이 있는데 추장이 될 사람은 1년에 한 차례 사람들을 청해서 잔치를 베푼다. 그리고는 부족민들이 보는 가운데서 자신의 소유물을 철저하게 부숴 버리고 불태워 버리는 관습이 있다고 한다. 무소유(無所有)가 될수록 존경받는 추장의 조건이 된다는 의미이다.

목사에게 뿐만 아니라 성도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상실에의 수용이다. 구원이란 이 땅의 것들을 자꾸 모으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때문에 이 땅의 것들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그러므로 목사가 되었다는 것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목사라는 직 자체가 또 하나의 버릴 것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목사직에 안주하게 되고 말 것이다. 주님 앞에 서는 것은 목사직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에 의해 구속받은 자로 서게 된다. 그러기에 주님 앞에서 날마다 새로운 주님의 백성으로 또한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날마다 목사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교회는 자기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듣기 위해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부름받아 나온 자들이기에 순간순간 자기의 눈을 찌르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는 죄인의 모임에 불과하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마 16:24)는 말씀이 먼저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목사는 먼저 자기의 눈을 찌르는 자세로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날마다 자기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일 것이다(갈 5:24)(김영대/200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