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주간을 고행으로?
고난 주간을 고행으로?
한국 기독교는 해마다 고난 주간을 지내게 된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 한 주간을 좀 더 뜻깊게 보내려고 한다. 크게 두 부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소극적인 모습과 적극적인 모습이다. 소극적으로는 평소에 거리낌 없이 행한 오락이나 방탕한 생활을 고난 주간만큼은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 보려고 금식을 하거나 그밖에 다른 육체적 고통을 스스로 맛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 교회의 이 한 주간은 실로 초상집 분위기이다. 한 마디로 고행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심도 깊게 하고 주님의 고난에도 동참한다는 두 가지 명분이 세워지기에 충분한 주간이 고난 주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난 주간에 오락과 방탕한 생활을 절제하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행하기 이전에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동기, 마음의 자세 또는 근본적인 사고(思考)를 진단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어떤 의식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종교적 의식을 계속적으로 반복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적 의식을 행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에서 나온 행위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실상 우리가 동참하거나 나눠 가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리스도로서의 고난이요 그의 죽으심은 언약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던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약속을 완성하신다. 그것이 새 언약이었다(눅 22:16). 그래서 유월절 만찬 때에 떡과 포도주를 주심으로 새 언약을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늘 기억하라고 하신 뜻이었다. 이제 새 언약 안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늘 기억하고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또한 바울 사도 역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러기에 그분의 고난은 그분만이 담당하실 수 있고 그러셔야만 했던, 구세주로서 당하신 유일한 고난이요 죽음이었다. 실로 독생자로서의 고난이고 죽음이었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추가하거나 그것을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원 사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의의 사역에 아무 것도 더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란 내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흉내낸다고 해서 하나님의 희생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말을 쉽게 하는데 실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 아픔과 고뇌를 되뇌어 보며 슬퍼하고 가슴아파 하며 행하는 감상적인 일들만으로는 오히려 그분의 고난을 욕되게 하며 무의미한 것으로 돌릴 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못박혀 본다고 한들 그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더욱더 모독하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분만이 하실 수 있었던 구원 사역에는 우리가 끼어 들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현재 나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 보려 한다는 것은, 사실상 본의는 결코 아니라고 할지라도 스스로를 구세주로 높이려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은 결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는 구세주일 수 없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진심으로 감격하며 감사할 뿐인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감사하는 자세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 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난임이 분명하다.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을 좇아가게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단 한 주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되어져야 한다. 아니 날마다 주의 성령에 의해 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 주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다. 고간 주간 한 주간만 고난을 생각하며 지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일년 내내 고난 주간이며,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김영대/200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