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리 2008. 6. 7. 19:38

 

예수님 없는 말씀

 

 

얼마전 어떤 수양관(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갔었다. 기도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굳이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나는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기도라는 것 자체가 삶이어야 하기에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살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한 번씩 책을 한 배낭 싸들고 일주일을 지내고 올 때가 있다. 간간이 산책도 하고, 운동도 조금씩 하지만 주는 밥을 먹고는 거의 책을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온다. 평소에는 늘 컴퓨터와 친하게 되고 또 집에 있으면 컴퓨터를 안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컴퓨터와도 좀 떨어져 있고 싶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보고자 하는 바램에서 그렇게 한다.

 

수양관 입구에 들어서니 로비에 이렇게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역대하 7:15 말씀이었다. 과연 이 말씀이 기도원에 써 붙여 놓으라고 주어진 말씀일까? 역대하 7장의 상황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에 처음 제사를 드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역대하 7:12-22 말씀이다. 역대하 7:15 말씀은 이 문맥 속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7:16에 보면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이란 단순히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이다. 성전을 통해서만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수단이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사란 곧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메시야가 오셔서 희생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전을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셨다는 것은 이 땅의 존재로 오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란 언약의 성취로 오시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전보다 더 큰이”라고 하셨다(마 12:6). 또한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 그리고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이 곧 성전 된 예수님 자신의 몸을 일컬어서 하신 말씀이었다(요 2:21).

그런고로 역대하 7:15의 말씀은 기도원에서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곡해이다. 말씀이 의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전혀 엉뚱한 곳에 갖다 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역대하 7:15에서 말씀하는 바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내 이름 무시하고 주님의 이름에 의해 기도 드려지고 주님의 이름에 의해 시행되어 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저녁 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기 위하여 식당으로 들어섰다. 주방의 큰 유리에 이런 말씀이 써 붙여져 있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는 요한복음 6:12 말씀이다. 아니 이 말씀을 또 이렇게 갖다 붙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예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실로 웃을 일이 아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신 이적을 베푼 내용이다.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예수님이 산에 오르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요한복음 6:6에서 밝히고 있다. 빌립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그때에 안드레가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안드레도 하는 말이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리에 앉게 하시고 축사하신 후에 음식을 나누어주게 하셨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시험하셨다. 시험하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몰라서 예수님이 알아보았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시험하신 것은 그들의 현재 마음 상태를 지적하고 드러내시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하여 200데나리온으로 계산하여 돈으로 따지는 마음이었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마음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상이라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거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적으로 따지는 그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이다. 인간은 도무지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시고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셨다. 남은 조각을 거두게 하신 것은 주님의 일하심에 대한 증거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어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주님은 이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친히 생명의 떡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이적을 표적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표적이란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말이다. 이정표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적들을 행하심으로 진실로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마태복음 12:39에 의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이 이적들을 행하심으로 보여주고자 하신 궁극적인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을 통해서 그분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것은 곧 주님의 표현대로 썩는 양식에 불과한 것이다(요 6:27). 그것이 비록 주님이 주신 떡이든 혹 주님이 행하신 표적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떡으로 배부른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생명의 떡으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을 보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다 썩는 양식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6:12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식사 후에 잔밥 처리가 잘 되도록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주위를 청결케 하고 자연을 보호하기 위하여 오폐수를 버리는 기업을 감시하라는 것으로 환경 운동을 하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해서는 결코 안된다.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면 주님의 말씀인가? 말씀을 기록해 놓고 인용된 성경 구절을 표시해 놓으면 그것이 말씀의 권위가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없는 한낱 문자의 나열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이라고 우겨서는 안될 것이다.

 

아모스 8:11에 이런 말씀이 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기서 날이 이른다는 것은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이른다는 의미이다. 즉 종말의 때가 이른다는 것이다.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한 가지가 말씀이 없는 기갈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의미이다. 종말의 때에는 인간의 죄악상이 극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죄악상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극에 달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신다(계 1:7).

오늘날 유명한(?) 교회의 목회자에 의해 유명한(?) 설교집들은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드러낸 것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홍수가 났을 때에 가장 심각한 것이 식수이다. 물이 많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어서 기갈을 당하듯이 말씀이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말씀이 없는 한국 교회의 상황이다. 온갖 이름을 다 갖다 붙인 성경은 즐비하고 말씀을 해석한 책들이 산더미같이 출판되지만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주님의 권위로 그에 복종하는 모습이 없다. 말씀의 기갈이라서 생기는 현상인가? 주님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이리라.

 

히브리서 4:12 이하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브리서 1:1,2에 의하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은 목사가 제대로 선포해야 말씀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며 공개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 있는가? 십자가에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계신다.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향해 여전히 찔러 쪼개며 역사를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시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기록된 말씀의 역할은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드신다.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 우리가 전도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루어 내신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풀고 적용시키면서 주님의 일하심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중심으로 우리의 필요에 의해 성경을 함부로 인용하면서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한 말씀의 역사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말씀을 말씀답게 드러내어야 주님의 일하심이 드러난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욕심에 말씀을 갖다 붙여 이스마엘을 양산해 놓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라고 말씀을 도용하는 사기는 치지 말자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는 말씀은 없고 교회 성장만 있다. 말씀은 적당히 밀쳐두고 교회 부흥만이 말씀의 본질인 것처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과라고 떠벌리고 있다. 교회 부흥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말씀이 난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말씀은 아모스 때에나 오늘날이나 동일하게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니 말씀이신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수밖에 없었는가? 말씀이 수난을 당하고 있는 이때가 바로 종말의 때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였을지라도 주님이 말씀에 의해 보낸 자가 아니라면 성도가 아니며 교회가 될 수 없다. 성도요 교회란 어떤 존재인가? 한 마디로 말씀에 사로잡혀 사는 존재이다. 말씀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자여야 한다. 말씀이 가라고 하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서라고 하는 데까지 서는 자가 말씀의 이끌림을 받고 말씀에 장악되어 있는 자이다. 주님은 오늘도 자기 십자가로 말씀에 복종하는 성도요 교회로 드러내고 계신다(김영대/200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