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리 2008. 6. 4. 21:49

능력

 

능력! 이는 참으로 매력적인 말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다. 남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내가 먼저 알고 가르친다는 것은 기쁨 그 자체이다. 상대방의 위에서 상대를 누르고 있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다.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능력을 가지려고 한다. 자기 능력이 남들 앞에서 무한히 과시되는 인간이 참된 인간이다.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상태가 살맛 나는 세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과 같다고 경멸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부단히 배우며 실력을 쌓아가고 있다.

이러한 심성을 교회에서도 버리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언하자면 성령을 받은 자는 능력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가 아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에게 온갖 능력을 갖추도록 특수 훈련을 시키고 있다. 희한한 무기들을 나누어주고 있다. 아니 팔아먹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것이 남는 장사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능력받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능력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신기한 이적을 베푸는 것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무엇이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은사도 능력이다.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은사를 소유한 '람보'와 같은 교인이 되는 것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다. 람보 교인이 되는 지름길이란 간단하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무식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의 주특기라도 완벽하게 하기 위해 교회에다 모든 것을 투자한다. 그러니 실제적인 효과가 자기에게서 나타나지 않거나 교회로부터 받은 무기가 부실한 것으로 판정되면 예배당에 나오는 것쯤은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그때에 목회자는 마지막 히든카드를 제시한다. '믿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 부친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밝히고 있다(고전 1:18). 하나님의 능력은 다시 홍해를 가르는 것이 아니고 만나가 내리게 하는 것도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방언이나 예언을 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이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이 죽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그러기에 세상의 힘을 축적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죽는 모습이 능력있는 자의 모습이다. 이는 성령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말과 능력이 대조되고 있다. 즉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삶이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때문에 말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는 삶의 모습이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너무도 나약한 것이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내게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신기한 능력이란 없다. 내가 원하는 능력이란 주님 안에 없다. 다만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들어와 있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망해도 주님의 십자가 능력 때문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도이다. 성도는 세상의 힘에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권능에 사로잡힌 바 된 자이기 때문에 복음에 목숨을 내어 맡기고 날마다 죽음으로 기어 들어가게 되어 있다(19990911/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