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창세기

116. 창세기 44:14-34 요셉과 형들의 만남(7)

불편한 진리 2025. 5. 1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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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16

창세기 44:14-34

요셉과 형들의 만남(7)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14절).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라고 하여 유다가 형제들의 대표로 나선다는 것을 말씀한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대신 희생을 감당하겠다는 유다의 간절한 마음이 표현된다. 요셉이 “아직 … 있는지라”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오드’는 ‘반복, 계속, 연속, 다시, 아직, 그 외에’라는 뜻이다. 요셉이 아직 그곳에 있었다는 것은 반복하여 보는 것으로 비로소 형제임을 알게 된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형제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여 반복된 만남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은잔 사건을 통해 언약이 가리키는바 속전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 할 때가 되었기에 반복된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15절). 우리 성경에 “점을 잘 치는 줄”이라고 번역한 말은 ‘나하쉬 나하쉬’라고 반복된 단어를 쓴 것인데 ‘경험으로 알다, 예지하다, 열심히 관찰하다, 확실하게 점치다, 점이나 징조로 알다’라는 뜻이다. 이렇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 바로 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총리대신 역시 그런 위치에 근접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꿈 해몽의 권위자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베냐민의 죄는 단순한 죄가 아니며 점을 잘 친다는 말을 통해 이미 형제들의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냄으로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형제들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꿈으로 주신 계시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드러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5절에서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라고 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늘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17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16-17절).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라는 말은 율법 아래 있는 상태의 죄인이 진리를 말할 수 없는 상태임을 철저히 고백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16절)라는 말씀의 “정직함”이란 ‘차다크’로 ‘올바르다, 공의롭다, 의롭다’라는 뜻이다. ‘의’는 하나님의 의로 언약이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 자신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그 의를 나타낼 수 없다는 고백이다. 유다가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누가 알려주었나? 바로 다말이었다. 하나님은 다말 사건을 통해 유다에게는 의가 없음을 이미 보여주셨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차다크)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그래서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17절)라고 말하였다. 이제까지 보이는 사실만 가지고 의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죄인으로 치부하는 것이니 그 죄를 적발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알게 되었다. 과거 유다는 요셉을 종으로 팔자고 제안하였는데(창 37:26-27) 이제는 자기가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한다. 요셉을 죽음에 넘기울 때 아버지에 대한 이해심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에 대한 증오심만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아우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는 영영토록 아버지에게 죄를 짓고, 아버지는 음부로 내려갈 것이기에 베냐민을 대신하여 형제 전체가 공동책임으로 종이 되겠다고 자원한다.

그러나 요셉은 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되고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올라가라고 말한다. 언약의 주체자 요셉이 그들을 종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지 스스로 종이 되겠다고 해서 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죄의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적인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겠다고 하여 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 종으로 삼아 주셔야 하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 “가까이 가서”의 ‘나가쉬’는 ‘가깝다, 가까이 가다(오다, 있다), 함께 눕다, 자리를 내주다’라는 뜻이다. 유다는 율법을 행하는 자기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언약을 성취하는 아들 요셉과 하나의 말을 하는 과정으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라는 표현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진노 아래 있음을 고백한 것인데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것으로 진노는 제거된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총리인 요셉을 바로와 같은 존재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보내신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밀을 밝혀주셔야만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가 된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19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20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19-20절). 여기서부터 34절까지 이어지는 유다의 이야기는 탄원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애굽에 첫 번째로 왔을 때부터 두 번째 오게 된 상황에 대한 것이다. 결론은 자신이 형제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겠다는 것이다(33절). 이렇게 기록하지 않아도 독자는 이미 앞의 사건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유다의 말을 빌려 이렇게 지난 사건을 반복하여 기록한 이유는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건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새김으로 언약을 알게 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형제들의 공동 희생이 아닌 유다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는 것이다. 유다의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의 물음에 답하여 우리가 아버지가 있으며 노년에 얻은 두 아들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아버지가 심히 사랑합니다(19-20절).

② 그 아이를 보이라고 하였지만 그는 아비를 떠나지 못하니 떠나면 아버지가 죽을 것입니다(21-22절).

③ 그러나 아우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우리를 다시 만나주지 않겠다고 하여 우리 아버지에게 그대로 고하였습니다(23-24절).

④ 그 후에 우리 아버지가 다시 곡물을 사오라고 하시기에 아우를 보내지 않으면 다시는 애굽에 갈 수 없습니다(25-26절).

⑤ 우리 아버지가 만일 이 아이에게도 그 형에게 임한 재앙이 똑같이 임한다면 슬피 울며 음부로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27-29절).

⑥ 아버지와 그 아이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기에 만일 우리가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우리 아버지를 죽게 하는 일입니다(30-31절).

⑦ 내가 나의 아이들을 담보로 하기까지 아버지를 설득하였습니다(32절).

⑧ 그러므로 아이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갈 수 없으니 나를 대신하여 종으로 삼고 이 아이는 형제들과 함께 보내주십시요(33-34절).

 

단지 자신의 죄를 알고 반성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신 희생하겠다는 고난을 자처하는 거기까지가 회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다의 회개를 통해 형제들이 요셉과 하나되어 “그 아이를 대신하여”(33절)라는 대속의 희생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30절)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34절)라고 말하였다. 즉 아버지와 하나인 아들 베냐민과 함께 하는 것이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는 것은 죽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형제들이 죽음에 넘겨진 자에게 절한다는 말씀이 요셉에게 성취되었듯이 이제는 대신 죽음에 넘겨진 유다에게 형제들이 엎드려 절하게 될 것이다. 이는 후에 야곱이 유다에 대한 예언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8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들의 목을 움켜쥘 것이다. 네 형제들이 네 앞에 절을 할 것이다. 9 유다는 사자 새끼와 같다. 내 아들아, 너는 먹이를 잡고 돌아오는구나. 내 아들은 마치 사자와 같이 웅크리기도 하고 몸을 펴기도 한다. 마치 암사자와 같으니, 누가 그를 깨우겠는가? 10 유다에게서 왕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유다에게서 다스리는 자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유다는 참된 왕이 올 때까지 다스릴 것이다. 온 나라는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창 49:8-10 / 쉬운성경).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언제나 희생정신을 가진 자가 다스린다. 이런 점에서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형제들이 유다에게 절을 할 것이다. 유다의 후손이 형제들의 주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이러한 언약 정신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넘기셨고 형제들과 만남의 과정을 통해 유다가 요셉이 당한 죽음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언약 정신을 잇는 자로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르우벤은 육적인 장자이고 유다는 영적인 장자인데 요셉은 육적인 장자,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김으로 작은 자를 통해 이루시는 야곱 언약의 성취를 위해 보이지 않는 장자로 선택된 자였다. 결국 언약의 성취는 유다의 후손으로 희생을 이루실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것이다.

결국 유다 지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언약 성취를 위해 자기 백성들을 대신 받은 고난이었고 죽음이었다(딛 2:14). 그것은 죄인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죽음에 넘겨진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기에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시니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하였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 땅의 죄인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하는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물인 동시에 대속을 이루신 은혜의 표적이다(2025051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창116.4414-34 요셉과 형들의 만남(7)(2025051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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